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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책

마스다 무네아키, 지적자본론




<지적자본론: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

"기업은 모두 디자이너 집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기업은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없다."


2018년의 디자인 추천도서 리스트에 있어서 읽었는데, 몇 번을 읽어도 참 적응이 안 된다. 옹골찬 제목과 부제에 잘 드러났듯 이 책의 키워드는 단연 '디자인'이다. 그런데 마스다 무네아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디자인이란, 그간 내가 경영 혹은 마케팅이라고 불렀던 것들이다. 돌이켜보니 도서관에도 800(예술)이 아니라 300번대(사회과학)에 꽂혀 있었다. 뭐 내가 이 책을 무엇이라 말하건, 필자는 꿋꿋이 하고픈 이야기를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풀어간다. 그런데...

(1) "상품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기능, 또 하나는 디자인이다. 어떤 상품이든 마찬가지다. 유리잔을 예로 들어 보자. 액체를 담는 것이 기능이고, 손잡이가 없는 유리 제품이라는 것이 디자인이다. (중략) 디자인은 전문 디자이너에게 맡기면 된다는 식의 태도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디자인이 상품의 본질인 이상, 거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즈니스에서 무용지물이다.(44쪽)" 

이때까지 필자가 말하는 디자인은 상품의 외형이었다.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미래'라는 이 책의 부제는 '최소한의 미감은 갖춘 비즈니스맨이 되어라'로 해석된다. 현재 시점에서 모든 사람은 아직 디자이너가 아니다.

(2) "디자인은 가시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념이나 생각에 형태를 부여하여 고객 앞에 제안하는 작업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결국 '제안'과 같은 말이다. (중략) 제안은 가시화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디자인, 그러니까 제안을 가시화하는 능력이 없다면, 또 디자이너가 되지 못하면 고객 가치를 높이기는 어렵다(50쪽)."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다' 처럼 디자인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확장시키는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 문장을 곰곰이 보면, '생각을 가시화하는 사람'을 꼭 디자이너라 부를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 건축가나 음악가나 소설가를 넣어도 뜻이 통한다. 실제로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넣어도 말이 되는 문장에 굳이 디자인을 소환하는 이유가 뭘까. 있어 보여서? 이유야 뭐든,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저 문장에서 그저 수사적으로 낭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 장에서는 범위를 대폭 넓혀 디자인을 '생각을 가시화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디자인과 제안의 구분이 불분명한 건 둘째치고,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이미 디자이너다. 정의 자체도 공허한데다 앞서 '디자인을 모르는 비즈니스맨은 무용지물' 이라 호소했던 것마저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이 말대로라면 그 무용지물도 이미 디자이너일 테니까.

(3) "물론 비즈니스맨 각자에게 미술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들어가 디자인을 공부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와 동시에,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테제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앞으로 비즈니스맨에게 제품 디자인 등에 관한 감각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될 것이다(62쪽)"

필자의 의도가 짐작은 간다. 시각적 아웃풋을 내놓는다는 의미의 통상적인 디자인과 아이디어를 가시화하는 능력이라는 필자 피셜의 디자인은 아무튼 볼 시(視) 자를 공유하기에 비유 이상의 교집합을 가진 것은 맞다. 그러나 또다시 디자인을 '미술 대학이나 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전문지식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핵심 개념마저 갈팡질팡 중언부언하는 모습은 글쎄다...

이 책에서 수사적 낭비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디자인'이라는 단어의 쓰임뿐만이 아니다. '제안'보다는 큐레이션, '클라우드적 발상'보다는 탈관료제나 수평적 조직구조라고 말하면 안 되었던 것일까. 이미 있는 단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낯선 단어와 자의적 정의로 설명해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찾지 못했다. 기존의 단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다른 말을 만들어야 할 만큼 새로운 개념인지도 잘 모르겠다. 

아쉬운 점은 또 하나 있는데 책 말고 나의 게으름에 대한 것이다. 읽는 내내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2019년 현재 <지적자본론>은 아웃사이더의 상큼함을 모두 소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문방구였던 텐바이텐은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이 되었고 츠타야를 벤치마킹한 별마당 도서관과 아크앤북이 연 지 오래였다. 자주 쓰던 큐레이션 앱에서는 그간 작성한 별점과 리뷰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공지하며 구체적 액수까지 일러 주었다. 상품보다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하는 건 익숙하고, 취향이 돈이 되는 모습을 진즉 현실에서 목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운 미래를 너무 예리하게 내다본 탓에 같은 해 나온 어떤 책보다도 빠르게 눅눅해진 것이 아닐까. 한때 아웃사이더였던 필자의 혁명론은 점점 일반론이 되어가는 중이다. 필자의 확신에 찬 단문 스타일은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솔직히 나한테는 성공한 사업가의 단호한 자기자랑으로 읽혔다. 

분명히 출간 당시로서는 대단한 선견지명이었을 것이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통찰도 남아 있다. 좋은 취향은 돈만으로는 가질 수 없으며 그렇기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도 동의한다. 재무자본의 소유자는 본인일지언정 지적자본의 소유자는 각 분야 베테랑인 컨시어지 직원들이므로 우리는 갑을이 아니라 평등한 병렬 관계여야 한다는 말은(회장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지만) 더디게 바뀌고 있는 노동환경에 유효한 지적이며 다른 회장님들께서도 한번쯤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그러나 감히 말하는데 지금 시점의 이 책은 트렌디하다고 하기에는 뒤쳐졌고 클래식이라고 하기에는 덜 벼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