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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근황

4월 중순부터 출판단지에 있는 작은 출판사에서 디자이너 일 하고 있다. 포토샵과 일러스트로 북커버, 카드뉴스, 전단지, SNS광고 같은 걸 만든다. 그밖에도 광고 집행, 영상 편집도 하고 전화도 받고 포장도 하고 시키는 건 다 하는 막내다. 퇴근은 5시다. 30분쯤 걸려서 집에 돌아오면, 부업 삼아 제품 사진 보정 알바를 한다.

뜻밖의 투잡이라 장단점이 있다. 일단 돈이 잘 들어오고, 두 가지 일 모두 큰 스트레스 없이 재밌다. 아직까진 그렇다. 단점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일이 아주 많지 않은 시기라서 그럴 거다. 초중고 학습서 만드는 출판사는 4월이 비수기라고 한다. 중간고사 준비하느라 책 안 사니까. 일 늘어나면 또 힘들다고 징징대러 오겠지.

아무튼 요즘 하는 일은 모두 포토샵 하는 재주를 돈과 교환하는 일이다. 초딩 때 슈가 팬시 만들려고 배운 포토샵 실력인데 반오십 평생 징하게 써먹는다. 포토샵은 해마다 기능이 업그레이드되는데 사용하는 기능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지금도 슈가 노래 듣지.

농담 반 진담 반 "이럴거면 초졸 하고 취업해도 됐었나" 한다. 초등학생도 할 법한 소박한 재주도 돈으로 치환된다는 걸 깨닫는 데에 그 많은 세월과 돈을 썼나 하는 의문이 가끔 든다. 전공 지식들이 제일 먼저 입을 훕 다물었다. 굳이 인생에 대학교가 필요했었나. 그래도 재밌었으니까 됐다. 뭐 배우러 다닌 게 아니고 통째로 취미였다.

"동아리가 재미는 있었는데,
그게 전부인 줄 알았던 게 후회 돼.
미래 생각 좀 할 걸."

3학년 때쯤 소사 친구들하고 술 마시면서 했던 말이다. 그땐 전공=미래라고 생각했다. 동아리는 전공과 무관하니 시간낭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에야 실감하고 있다. 전공도 미래가 아니라는 거슬... 그럼 미래는...? 몰라... 미래는 없다. 현재만 있다. 그리고 재미는 현재 시제다. 지금 재밌는 게 제일로 중하다.

학교 다닐 때는 헷갈렸었다. 낙천적인 편이라 무슨 일이든 막상 하고 있을 때는 꽤 괜찮은 일처럼 느껴진다. 어떨 땐 이게 잠시 힘들어 지친 건지 진짜 재미가 없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경험상 아래와 같은 말을 하게 되면 그 일은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이런 경험 쌓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다."
"지금은 이 일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깨닫는 날이 올 거다. 일단은 묵묵히 견디자."

첫번째는 가치를 찾다 찾다 안 되니 그게 '감각'된다는 사실에 의미부여하는 말이다. 두번째는 의미 찾기를 기약없이 먼 미래에 떠넘길 때 하는 말이다. 의욕 없고 지친 채 '존버'하면서 속으로 저런 자기최면을 건 적이 종종 있었다. 가당치도 않았다. 얼마나 저게 개소리냐면, 누가 드럽게 재미없는 썰렁 개그를 하고서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본다.

"썰렁 개그를 경험하는 것 자체가 가치있는 거야."
"오늘 밤 자기 전에 생각하면 분명 피식할 거야."

무슨 헛소리냐. 후자는 너그럽게 쳐 줘도 데드라인은 오늘 밤 잠들기 전까지다. 그때까지 생각나지 않으면, 내일이나 일 년 뒤 혹은 먼 미래에 생각날 일은 없다. 잊혀진다. 남는 게 없는 일들은 저런 식이었다. 지금 뭘 하는 건지 모른 채 최종발표까지 했던 전공수업, 학부연구생 경험이 쓸모 있을까 싶어 교수 연구실에서 허드렛일 하면서 시간 보냈던 일이 떠오른다. 그냥 하지 말아버릴 걸.
그럴 때 싫은 건 절대 안 하고 지 재밌는 것만 쏙쏙 골라 하면서 이게 바로 "대학생활에서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이라고 뻔뻔하게 미화하는 법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

이상 요즘 뭐하고 사는지 쓰려다가 아무말 대잔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