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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산안무라고 말해보고 싶어서 쓰는 글

퇴근길에 눈여겨 보던 전봇대가 있었다. 모가지에 요란하고 누덕누덕한 새집이 붙은 그것. 부슬거리고 너덜너덜한 게 견고함이라곤 거리가 먼 둥지였다. 누가 저런 집을 짓지? 밋밋한 동네에서 독보적으로 꼬질꼬질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그 전봇대는 마치 건조기에 돌린 양말 속에서 발견되는 새카만 머리털매듭처럼 눈에 툭 걸렸다. 퇴근하는 길엔 항상 그걸 보게 된다. 

저거 저거, 합선되겠다. 근데 새 둥지 재료가 지푸라기랑 나뭇가지뿐일건데 합선이 되나? 철사 같은 거 섞여 있어서 그런가? 누가 그러길 까치집 제거하는 한전 차에는 유해조수 처리 가로 열고 '까치집' 가로 닫고, 이렇게 써 있다던데, 어떻게들 알고 다니는 거지. 그나저나 그거 둥지 치우면 가져가나? 벌집 뜯듯이 통째로 뜯나? 그럼 안에 새는 어떻게 돼?

일자로 쭉 뻗은 길이라 나는 아주 멀리서부터 그 전봇대를 응시한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갈 수 있었다. 근처에 날아다니는 새는 한 번도 못 봤다. 버리고 간 빈 집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눈동자는 자주 무슨 새 없나 하고 올려다봤다.

그러던 어느 날 새집이 없어졌다. 갑자기 마음이 조여들었다. 오, 거봐 내가 저거 없어질 거 같다고 했잖아. 한전이 일 열심히 한다니까. 어떻게 됐을까. 알고 싶기도 하고 알기 싫기도 했다.

평소처럼 그 길을 따라 쭉 걸었다. 이쯤이었는데 싶은 위치에 다다를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고개를 쳐들고 군데군데 때 낀 전신주를 찾았다. 그래 이거다, 진짜 누가 없앴네. 호기심과 서글픔이 동시에 차올랐다.

굳이 이렇게 할 것까진 없었지만 고개를 땅에 처박고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바닥에 떨어진 게 없나 살폈다. 가는 나뭇가지와 카페트 섬유질과 뽀송한 털 따위가 긴밀하게 뭉친 조직을 찾았다. 오 이게 새집 재질인가. 그러던 차에 깨진 민트색 메추리알 껍데기를 보고 말았다. 메추리알보다 더 작았다. 아...맞나 봐. 그냥 밑으로 던지나보네.

그리고 몇 발자국 더 가서 죽어 있는 참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빠그작. 일요일 아침 동물농장 애청자의 '산뜻하고 안온한 무지'에 금이 갔다. 나는 전봇대를 뒤로하고 집까지 일 키로 남짓 더 걸었고 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으나 '다 쓸데없다'고 회피하는 내용일 따름이라 말해 뭐하나 싶다.

이게 지난 주 화요일 일이다. 오늘까지 그 길을 다시 걸은 적은 없다. 참새가 그 자리에 계속 누워 있을 거 같아서. 지금은 카페에서 쓰고 있는데 기가 막히게 카페에 참새가 들어왔으며 나는 출근 핑계를 대곤 도망치듯 사무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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