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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2019)

교양레포트: 말레나/안나카레니나를 보고 쓴 <있어빌리티>(음악의 이해)

중간보고서_영화감상문_있어빌리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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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예술이 사기 치는 법: 있어빌리티>

 

01 예술은 사기다.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거든요.*” 


백남준의 말이다. 어떤 이들은 이 문장을 어려운 현대예술에 대한 풍자 정도로 여기지만, 예술이 고등 사기라는 말 속에는 진실이 있다. 실재하는 것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술은 언제나 사기였기 때문이다. 「말레나」와 「안나 카레니나」는, 스토리의 윤리적 부정과 제작 상의 한계를 ‘아름다움’이라는 수법으로 매끈하게 눈속임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처럼 성공적인 사기극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서양에서 미(美)는 절대가치로 군림한다. “아름다운 것은 신성하고 선하다”,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는 진술은 미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적 주도권을 쥔 서구 문화는 이러한 인식을 세계적으로 유통시켰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예술이라는 멋진 사기극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 그것을 향유하고 애호하며, 때로는 손에 넣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런 욕망의 본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 다다른다. 


칼로카가티아 :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그리스인들은 최초로 아름다움을 신에게 물은 민족이다. 델포이 신전의 벽에는 “가장 올바른Agatos 것이 가장 아름답다Kalos”는 신탁이 적혀 있다. 이때 가장 아름답고 선한 것을 의미하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는 선Agatos과 미Kalos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칼로카가티아의 구현은 칼로카가토스kalokagatos들이 맡았는데, 이들의 직업은 다름 아닌 올림픽 출전자였다. 이들은 올곧고 강인한 정신력과 아름다운 육체를 겸비함으로써 당대 그리스인들의 동경과 팬Amator 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운동선수가 운동만 잘 하면 되지, 잘 생긴 게 무슨 소용이냐”고 묻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미美 를 절대가치로 숭상하는 서구 특유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껍데기’로 천시하고 비본질적인 가치로 여기는 동양 문화와는 다르다. 배고픔의 해결책으로 출발한 서구사회의 아름다움은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개념이었다. 화려한 궁정 건축이 주는 경이로움을 통치 기술로 이용하고, 빠르게 기억되는 선율의 오페라로 관객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등 아름다움은 당장의 실질적인 가치 창출과 직결되었다.

*백남준, TV 방영물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을 성공적으로 완성한 뒤 귀국 인터뷰, 1992년.

 


02 영화의 '고등 사기'


모든 예술은 사기다. 「말레나」와 「안나 카레니나」는 그 중에서도 고등 사기다.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아카데미상에도 노미네이트 되며 예술의 반열에 오른 두 영화.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여혐 영화’(말레나)와 ‘불륜 영화’(안나 카레니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비결은, 내용의 윤리적 거부감을 상쇄하는 탁월한 연출에 있다.


「말레나」 여배우를 여신으로 포장! 
‘아름다움을 타고난 죄’로 숭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 말레나. 그의 주변에는 아름다움에 취해 이성을 놓아버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인간의 이성을 무력케 하는 초인적 매력의 소유자 말레나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여신’에 가깝다. 여기서 과제가 생겨난다. 인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를 어떻게 ‘신’으로 둔갑시킬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영화 「말레나」는 치명적인 배경음악과 역사 속 성녀들의 신성함을 빌려 그것에 성공한다.


전략 하나, 음악 
고대 그리스인들은 현악기를 이성, 관악기를 감성과 짝지었다. 전자는 손으로 연주하고, 후자는 몸 속에서 끌어온 호흡으로 연주하기 때문이다. 영화 「말레나」에서 모니카 벨루치의 매력을 인간계에서 신계로 끌어올리는 일등공신은 음악, 그중에서도 관악기이다. 색소폰과 오보에를 비롯한 관악기 소리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해 뇌쇄적인 말레나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이런 특징은 레나토가 선인장 사이로 말레나를 훔쳐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카메라는 배우의 다리부터 끈적하게 훑고, 바이올린에 색소폰과 팬플룻이 차례로 더해진다. 화면에 말레나의 얼굴이 잡히는 절정의 순간, 오보에의 높고 날카로운 음색이 더해진다. 가늘게 떨리는 관악기의 음색은 마치 그를 엿보는 레나토의 떨리는 숨소리인 듯하다. 말레나 테마곡의 변주도 눈여겨볼 만하다. 말레나가 홀로 춤을 출 때 흘러나온  는 색소폰에 보컬을 얹은 단출한 구성이었지만, 레나토가 밤마다 말레나를 상상하며 듣는 는 매번 꿈의 내용에 맞추어 다른 편곡으로 등장한다. 쏟아지는 후광과 함께 순백의 말레나가 걸어 나올 때에는 화려한 오케스트라 반주로, 전장에서 총질을 하며 키스를 나누는 상상을 할 때는 행진곡 풍으로 편곡되는 식. 음악감독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적 센스와 재기발랄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략 둘, 성스러움의 은유 
말레나의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두 번째 방법은, 역사 속 ‘성녀’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에서 말레나의 포즈와 의상은 전형적인 성모상의 모습이다. 또한 레나토에게 엑소시즘을 행하는 씬에서 레나토의 몸에 올려 놓은 타로카드가 온통 마리아의 그림인 것도 말레나와 마리아를 연결 짓는 단서 중 하나이다. 한편 말레나는 서구사회에서 추앙받는 또 다른 여성,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고대 그리스의 최고 미녀 헬레네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말레나malèna’라는 이름이 그렇다. 둘은 공통적으로 ‘이상화된 미의 현전이라 할 수 있는 절세미녀’이지만, ‘나쁜, 잘못된’이라는 의미의 접두사 ‘mal-’이 더해진 말레나의 이름은 어딘가 뒤틀리고 불행한 이미지를 추가로 획득한다. 이처럼 감독은 서구사회가 공유하는 문화적 코드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무의식 중에 말레나를 너무나 성스러워서 닿을 수 없는, ‘가질 수 없는 것’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는 그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맹목적인 추앙과 지독한 멸시를 조금은 납득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또한 말레나를 신적인 존재와 등치 시키는 연출은 그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성을 일견 ‘한낱 인간의 발악’ 정도로 보이게 하는데, 이것 또한 전략적으로 도덕적 거부감을 누그러뜨리는 ‘포장’의 기술이다. 

「안나 카레니나」 : 미친 사랑의 시각화! 
<안나 카레니나>의 핵심 사건은 누가 뭐래도 안나와 브론스키의 파괴적인 사랑이다. 조 라이트의 2012년판 <안나 카레니나>는 현란한 스펙터클로 사랑에 눈먼 둘의 세계를 그려낸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고전 명화를 차용한 화면 구성이다. 서양미술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스크린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은 재치 있으면서도 귀족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더불어 한 편의 연극 무대처럼 구성된 시퀀스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장면 전환, 19세기 러시아 상류층의 화려한 삶을 알 수 있는 의상과 공간이 시선을 사로잡고 안나의 세계 깊숙이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꿈결 같은 설렘 -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  
안나와 브론스키의 밀회 장면. 비밀스러운 설렘이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된다. 아무도 없는 둘만의 세계에서 안나는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졌음을 고백한다. 하이키 화면과 번짐 효과로 꿈결처럼 달콤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둘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바람 부는 들판에 흰 옷을 입고 양산을 쓴 안나의 모습은,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을 닮았다. <파라솔을 든 여인>의 실제 모델이 모네의 첫사랑 카미유였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애틋하고 찬란한 연인의 모습을 전달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클로드 모네, <파라솔을 든 여인Femme à l'ombrelle tournée vers la gauche>, 1886, 캔버스에 유채. 

엇갈린 시선 - 메리 카사트의 <In The Loge>*
경마장 씬에서는 메리 카사트의 가 보인다. 긴소매의 블랙 드레스에 진주 귀고리를 하고 왼손에는 부채를 든 여성이 무대를 응시한다. 옆 객석의 남성은 그런 그를 몰래 지켜보고 있다. 설명만 들으면 그림에 대한 설명인지 영화에 대한 설명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두 장면은 닮았다. 의 배경은 오페라극장이고 영화 속 사건의 배경은 경마장인 것을 빼면,  무대를 응시하며 브론스키가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는 안나와 그런 안나를 예의 주시하는 카레닌의 스틸컷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리 카사트는 19세기의 여성 화가로서 살롱 미술의 성차별적 관행에 저항하며 화폭에 시선의 주체가 된 여성을 그려넣었다. 도덕과 욕망의 경계에서 꿋꿋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보적인 여성 안나와도 잘 어울리는 그림인 것 같다. 
*메리 카사트, '오페라 극장에서' 연작 중 , 1877-1878, 캔버스에 유채.

희생적인 사랑 - 안드레아 만테냐, <죽은 그리스도>*
감독 조 라이트는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톨스토이가 본래 소설의 목적이라고 밝혔던 순수하고 이타적인 사랑도 놓치지 않고 표현했다. 화려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콘스탄틴과 결혼한 키티가 그런 인물이다.  
키티가 병자의 누추한 알몸을 정성스레 닦는 씬은 카메라 앵글과 조명을 이용해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처럼 연출되었다. 이 장면에서 키티는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는 성녀 막달라 마리아처럼 보인다. 그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문 틈 사이로 키티를 엿본 콘스탄틴의 얼굴로도 빛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콘스탄틴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수발에 열중인 키티의 모습은, 도덕적 파멸 상태의 안나와 대조되어 더욱 성스럽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안드레아 만테냐,  <죽은 그리스도 The Dead Christ>, 1490, 캔버스에 템페라.

 

03 서양예술의 속성  "있어빌리티" 



 <말레나>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서양예술의 특징은 바로 “있어빌리티”다. 두 영화는 있어 보이는 능력(ability)이 탁월하다. 화려한 ‘포장’으로 윤리적 오류를 감추고, 역사적으로 ‘있어 보였던’ 예술작품과 신화 속 인물을 참조해 오늘날의 감성에 호소한다. 앞서 오감을 사로잡는 외적 요소를 ‘포장’에 빗대고 예술을 '사기'라고 칭했지만, 내적 요소를 '알맹이(본질)'로 여기고 그밖의 것을 포장으로 간주했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동양인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 표현일 것이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인이라면 대신 이렇게 말했을 거다. “포장까지 다 합해서 본질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나 마술 쇼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다. 멋지기 때문이다. 동양 문화에서는 망막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멀리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인간은 심오한 사상과 의미보다는 오히려 화려한 CG에서 나오는 시각적 쾌감이나 마술사가 모자에서 비둘기를 꺼내는 순간의 카타르시스에 더 빠르고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많다. 반면 서구사회는 망막적인 것을 평가절하하지 않고 포장과 알맹이를 구분짓지 않는다. 총체적 결과물의 '멋짐'을 추구할 뿐이다.

그럼에도 (총체적인)'멋짐'이 아니라 '있어 보임'이 서양예술의 본질이라 적은 이유가 있다. 내가 서양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서양예술을 보는 동양인의 안목은 타자의 안목이다.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 아니다. 이식과 학습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서양의 예술은 때로 과시와 맹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있어빌리티"다. '있음'이 아니라 '있어 보임'이다. 적어도 내게 서양예술의 본질이란, '머리로는 알겠는데 배워서 알 뿐 마음으로는 잘 모르겠는' 어떤 멋짐의 가능태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히 '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끝)

마무리 개 오글거리는구나

제목부터 <있어빌리티> 라니 뭔 고리땡적 트렌드리포트발 단어라서 부끄럽습니다.
깔끔하게 편집해놨을 땐 괜찮은가 싶었는데 글만 보니까 이게 뭐여...그래도 꿋꿋이 올려요
인터넷에 너무 자료가 없어서 아무 거지같은 거라도 참고하고 싶었던 과거의 저 같은 분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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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이 마음에 들어하셔서, 제출 끝나고 음악의이해 단톡방에 전문 공개됐답니다(수치플) 이미 너덜너덜해진 레포트라는 말이에요. 성적도 잘 주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