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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팅룸의 내밀한 전쟁

 

 

"매일 천장에서 정체 불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는 속옷 가게!"

지난 주 일요일 TV동물농장. 직원은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자꾸 난다며 제보해 왔다. 지렁이무늬 천장을 조금 뜯고 관찰카메라를 설치하니 범인은 고양이였다. 성묘 두 마리와 아깽이 넷으로 모두 여섯 마리. 애청자로서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특이한 건, 어른 고양이 두 마리가 다 암컷이었다. 부부가 애들 데리고 사는 흔한 그림이 아니었다. 자매가 합심해 자식 둘 조카 둘을 돌보는 공동육아의 현장. 전문가는 속옷 가게 천장 속이 "수컷 고양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최적의 공간" 이라고 말했다.

속옷 가게의 간판은 블러처리되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저기 일본 속옷 브랜드 에메필이자너. 아는 사람은 알 거다. 거기에 암고양이가 숫놈들의 공격을 피해 숨어들었다는 게 얼마나 찰떡인지. 뽕브라가 주력상품이라 뉴트럴하게 '속옷 가게'라고 부르기에는 직원도 손님도 마네킹도 여자들만 바글거리는 곳 답다. 역시 음기가 모이는 곳이라 고양이들도 이끌려 왔나 봐. 수많은 언니들의 먹고삶이 교차하는 자매들의 오이코스 에메필.... 한때 저도 참 좋아했었는데요. 동물농장 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에메필에서 느낀 낯선 언니의 손길.

새내기 때였다. 상체 부실 인간은 에메필 브라자가 가슴을 잘 모아준다는 말에 바로 구경하러 갔다. "초모리 보세요?" 쭈뼛거리는 내게 점원 언니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차분하게 줄자를 집어들어 내 가슴둘레를 쟀다. 티셔츠 위로 재는 게 이상했지만 손놀림의 프로다움에 난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맞는 사이즈는 이거라며 브라 하나를 손에 들려 주었다. 미소 띤 얼굴로 부드럽게 피팅룸 커튼을 젖혔다. "입고 나오세요~" 얼결에 건네받은 브라. 일단 윗도리를 벗고 대충 걸쳐 봤다. 엄청 불편했다.

"피팅 도와드려도 될까요? 저희 속옷 처음 착용하시기가 조금 어려워서요."

아니 괜찮,,,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커튼이 젖혀지고 불쑥 사람이 들어왔다. 당황할 새도 없었다. 언니는 허리를 숙이게 하더니 억세고 정확한 손날로 내 옆구리부터 겨드랑이와 가슴까지의 살을 무자비하게 끌어당겨 컵에 몰아넣었다. 왼쪽 한번 오른쪽 한 번. 재빠르게 내 몸을 거울 쪽으로 돌려세웠다. 불쾌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됐어요!"

당혹스러움은 거울을 보는 순간 하얗게 잊혔다. 난생 처음 보는 글래머 인간이 한 명 서 있었기 때문.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에메필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꿈 같았다. 홀리도록 능숙한 플로우였다. 다시 갈 일은 없겠지만 일요일 동물농장의 제보자를 보고 그 직원 언니 생각이 났다. 천장에 고양이 여섯 마리가 사는 걸 보고 놀라는 모습이 허술하고 인간적이고 귀여운 그 제보자 분도 피팅룸 커튼 너머에서는 단호한 손날의 프로 에메필 직원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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