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말 1) 깊게 감명받을 일이 갈수록 없다. 책이든 영화든 전시든 마찬가지다. 독해를 실패하는 일은 줄었는데 알아듣고도 '그냥 그렇구나'하고 말 뿐이다. '이건 좀 아니다'는 가끔 있어도 '오 멋진데' 는 찾기 힘들다. 그래서 어떻게든 좋음을 쥐어짜내려는 것들이 싫었다. 왜 구린 걸 구리다고 말하지 못하냐는 생각이었다. 도통 내 기준에는 모르겠으니 높은 사람이 시켰거나 불가해한 개인사가 얽혔거나 초딩 독후감 단골 결론인 '본받아야겠다'처럼 영혼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말 2) 요즘에는 반대다. 어떻게든 아주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는 게 훨씬 어렵다. 억지로 긍정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해도 구리다고 일축하는 것보다는 어려웠을 거다. 당장 오늘 본 전시에 관해서도 그럴듯한 의미 한 줄 찾아 쓰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타인에게 좋음을 이해시킬 만한 논리 구조를 고안해내고 레퍼런스 끌어 와서 징후적 알레고리적 느낌적 느낌이라고 마무리하기는...할 수만 있으면 하고 싶다. 좋거나 나쁘다는 인상이라도 있으면 그거에 살이라도 붙여 볼 텐데, 정말 무념무상 아무 생각이 안 들어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 일단 뭐든 부지런히 봐 두어서 나쁠 건 없으니 보기는 하지만...
아무말 3) 우연히 뻥튀기했다 말고 '증축'했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탄탄한 평론글을 봤다. 해석이 작품을 확장한다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일단은 해석을 착즙이라고 써 놓고서 그 평론가에게 물어보고 싶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그 영화가 과즙 줄줄 흐르는 상큼한 과일처럼 보이셨나요. 공부가 단단해질수록 세계는 푸석해지나요 쥬시해지나요. (그런데 짜서 뭐가 나오려면 애초에 즙을 갖고 있기는 해야 할 테니, 작품 밖에 제 발로 서 있는 평론을 착즙이라고 할 순 없겠다.) 낭만적인 대답을 바라는데 못 들을 것 같다.
아무말 4) 그 선생님은 '신형철'이고 책 제목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었다. 폴리아모리에 관한 책인 줄 알고 빌렸는데 뜻밖의 영화 평론집이었다. 끝까지 관련 내용이 안 나오려나 했는데 진짜 안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하다. 폴리아모리에도 잘 어울리는 제목이기는 한데 어떻게 펼쳐 보지도 않고 빌려올만큼 확신한 거지. 너무 재밌게 봤는데, 차마 그 책을 읽었다고 말하기 민망할 만큼 영화 안 본 게 많아서 자세한 건 영화부터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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