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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소외와 우리 할머니


- 디지털 소외라는 말이 유행이다. 디지털 네이티브에 초점을 맞춘 서비스가 아날로그 세대를 배제한다는 문제다. 줄 서서 표를 사는 노인들은 코레일 어플로 예매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뺏기고, 유튜버 막례쓰는 맥도날드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못한다.


- 우리 할머니는 전맹 시각장애인이다. 어느 날 로또 맞은 것처럼 앞이 안 보이기 시작하셨다. 노인 실명률 1위라는 황반변성증이다. (tmi: 할머니는 강철 멘탈과 개그감각의 소유자로 블랙 유머의 달인이시다.)


- 모든 버튼들이 터치스크린 속으로 사라지면서 할머니는 소외되었다. 다이얼이 있는 아날로그 라디오와 손에 익은 집전화가 유일하게 할머니 스스로 쓸 수 있는 물건이다. 4차 산업혁명템들은 스크린을 앞세워 할머니의 삶을 밀어내었다.


- 할머니가 유일하게 반가워한 물건은 AI 스피커였다. "샐리야." 샐리는 할머니에게 오늘 날씨도 일러 주고 패티김 노래도 들려 주었다. 늘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샐리가 "죄송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무한루프에 빠질 때면 기곗덩어리 앞에서 요즘 사람인 나와 동생도 소외되었다.


- 교수님이 그랬다. "이건 '블랙 박스'에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용자가 전혀 몰라요. 좋은 디자인은 아니죠." 팀플에서, 원터치식 미니멀 커피메이커 디자인으로 컨펌 갔다가 들은 말이다. 다 엎고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갈수록 블랙박스들이 늘어난다. 


- 나와 동생에겐 AI 스피커가 블랙박스고 할머니에게는 세계 전체가 블랙박스다. 노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인 우리 할머니에게는 세계가 나날이 더 새까만 블랙박스가 되어가는 것이 마음 아프다. 산업디자인 전공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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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공과 박사 선배가 그랬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갔어. 개발자들도 AI가 낸 결과물을 이해 못한다니까. 어떤 과정으로 그 숫자가 나왔는지를 알 수가 없어." 빠르고 편리한 4차 산업혁명의 세계가 소외시킨 건, 우리 할머니에서부터 시작해 최전방의 연구자까지 거의 모든 인간이다. 넘나리 의뭉스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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