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mi

재주는 많은데



"재주는 많은데..." 교수님이 내 포폴을 보고 한 첫 마디였다. 말줄임표는 무척 길었다. 오늘이 아니면 말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그도 나도 했던 것 같다. 애저녁에 해치웠어야 마땅할 질문들을 이제서야 듣고 답(을 못)하는 시간이었다. 정규 수업시간을 한참 넘겼다. 그래도 끝까지 눈을 맞추고 슬쩍 말려올라간 입꼬리로 내가 웅앵웅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 대단하신 분이다. 이럴 때마다 우리 학교가 꽤 괜찮은 학교였음을 깨닫는다.


어설픈 재능은 잔인하다는데, 지금까지는 좋기만 했다. 새로 뭔가를 시작하면 항상 혜성처럼 등장한 초급반 에이스가 된다. "소질 있으시네요." 뭐가 됐든 저 말을 들을 거란 걸 이제는 충분히 잘 안다. 습득력이 빠르고 금세 적응한다. 그 덕에 이렇다할 노력 없이 단타로 손쉽게 성과를 얻었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대신 장기전에는 약했다. 뒤쳐지려는 기미가 보이면 급격히 흥미를 잃었고 이내 그만두었다. 뭐 어때. 또 다른 곳으로 초심자의 영광을 채취하러 떠나면 그만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25세 이하 아마추어 천국에서는 어설픈 재능으로도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다른 걸 전공만큼 잘한다는 것은 전공도 별로라는 말이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는 걸 날로 깨닫는 요즘이다. 아무리 다재다능한들 결국에는 무엇 하나를 먹고 살 만큼 해야만 한다. 취미반에서 흥미와 우월감을 구하는 일은 기꺼이 학원비를 부쳐 줄 누군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지금은 부모님이지만 언제까지. 이대로라면 미래의 나도 오마르만큼이나 나의 어설픈 재능을 지독하게 원망하게 될 듯하다. 


평생을 취미반 수강생으로 살 방법도 없지는 않다. 나는 여자니까 남편 돈으로 주부 취미반 다니면 된다. 윽. 나는 발작하지만 비슷한 처지의 많은 여자들은 이 길을 선택한다. 그럴 수 있다. 계산기 두드려 보니, 여자 혼자 독립해서 사는 것보다 결혼해서 의존하는 편이 이득이니까. 자발적 노예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일 수가 있는 세상이니까. 


나마저도 평범한 계산 결과지를 받아들고 받아들이게 될까 봐 두렵다. 그 길은 내가 어설픈 재능조차 가지지 않은 분야에서, 시간이 나를 프로로 만들 때까지 (게다가 무급으로) 버텨야만 하는 끔찍한 길일 텐데. 최선의 삶이 그것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자살 안 하고 버틸 수 있을까. 경제력 없어서 비혼 못 할까 봐 불안해서 발버둥친다. 강한 부담이면서 에너지원이다. 걱정되는데 신난다. 


아.직.은. 웅앵웅거려도 참아 주는 교수님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껏 좋았던 걸 생각해서라도 아직 재능이 어설프니 어쩌니 투덜대기는 이르다. 인생 한 쿼터밖에 안 살았는데. 진지한 한탄은 십 년쯤 후에, 정말로 어설퍼서 도저히 안 되겠으면 마포대교 바람 한 번 쐬고 와서 해야겠다.

'tm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쾌차하세요  (0) 2019.04.05
새내기의 발표  (0) 2019.03.27
  (0) 2019.03.03
디지털 소외와 우리 할머니  (0) 2019.02.25
착즙하기  (0) 201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