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우산을 시래기 묶듯 아무렇게나 졸라매서 구석에 세워 놓고 들어왔다. 그 사람은 'ㅋ' 하면서 내 우산을 다시 집어들더니 우산살 하나하나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만졌다. 모처럼 우산에 칼주름이 잡혔다. 괜히 민망해서 "우산 대충 접으면 뭐 썩나? 아주 다림질까지 하지 그래?" 투덜댔는데 무척 그 사람다웠다. 그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도 뾰족한 생각과 칼 같은 시간관념과 각 잡힌 글씨체를 가진 사람이다. 우산한테도 칼 같이 구는구나.
가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가진 모든 사물이 한 가지 느낌으로 견고하게 엮여 있는 게 느껴진다. 옷이나 안경테 같은 거부터, 꺼내 둔 지갑과 슬쩍 비친 휴대폰 배경화면까지 한 가지의 분명한 취향이 있는 사람 말이다. 아마 고를 때 꽤 고심해서 골랐을 거다. 어쩌면 공책은 몇 년째 같은 제품일 테고 휴대폰 배경화면은 직접 만든 것이겠지. 이런 사람 중에 몇몇은 즐겨 듣는 음악이나 좋아하는 브랜드, 지내는 공간의 모습까지도 너무나 그 사람답다.
그런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사랑스럽다. 취향이 있어서 '아무거나' 쓰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물건을 아무거나 고르지 않았으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거나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아닐 거라는 확대해석인데 나는 매우매우 신뢰한다. 아마 말을 걸면 높은 확률로 재미있을 것이다. 한술 더 뜨자면 그런 사람과 친해지는 건 영광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나 사귀는 사람도 아닐 테니까...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기대가 과하다는 걸 한 번 반성하고, 과연 나는 취향 있고 사랑스러운 사람일지 두 번 세번 네번 다섯번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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