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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최종발표 PPT 마지막 페이지

보통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 지인들도 거의 좋아하기 마련인데 딱 하나 아닌 게 있다면 벌레다. (아 99%카카오 초콜릿도...) 곤충 덕후. 현실 지인 중에는 좀처럼 안 겹치는 캐릭터다. 초딩 땐 반 친구 여섯이서 곤충탐사 팸도 했었는데 초졸 이후로 다 손절했는지 나만 별종 됐다. 생활 곤충 얘기를 종종 써 봐야겠다. 오늘의 주제는 대학생활의 덕업일치 성공담과 폭망담. 

 

대학 와서 곤충을 주제로 발표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창의적 발상>이라는 조형대 교양. 중간기말 없이 한 학기 자유주제로 작업하는 과목이다. 나는 일상에서 만나는 곤충을 관찰하는 걸 하겠다고 했다. 관찰하고 사진 찍어두는 거야 누가 안 시켜도 늘 하던 습관이고 곤충 동정은 실상 기계적인 구글링 노동. 근데 교수님 눈엔 뭔가 창의적인 주제처럼 보였는지 컨펌 바로 통과됐다.

한 학기 날로 먹고 최종 발표날. PPT 마지막 페이지에 내 전화번호를 대문짝만하게 띄웠다. "자취방 벌레 방생 전문 혜스코" 라고 셀프영업했다. "연락 주세요. 노원 전지역 5분내 출동, 비폭력 인도적으로 해결해 드립니다." 했더니 웃겨서 박수갈채를 받았고 성적도 좋았다. 진심이었는데 아무도 연락온 사람은 없어서 서운했다(?)

 

다른 하나는 작년 퇴임하신 나성숙 교수님 디론 강의 때였다. 각자 감명깊게 읽은 책을 요약해서 스피치하는 시간. 내 책은 조안 엘리자베스 록의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였고 주제는 무려 '모기도 먹고 삽시다'. 어그로 만땅이었다. 당시 맹랑한 2학년 풋내기였던 나는 그날따라 역대급으로 주댕이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다. 

발표를 들은 교수님은 "여러분 내가 여섯시 내고향을 보니까 어떤 들기름 짜는 할머니가 나와. 평생 들기름만 쳐다보고 사랑하니까 늙어서는 아주 전문가가 되어서 존경받아요. 그러니까 응 자기는 모기를 열심히 해 봐 호호~" 하며 정리해 주시더니 성적도 잘 줬다. 너무 충격적인 개소리여서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 몇년간 내 이름은 모르고 그 발표만 기억하는 과 사람들을 만났다.

 

당연히 항상 잘되기만 했던 건 아니다. 내 곤충 덕질은 강약약강 인간 혐오하고 한 쌍이라 말이 덕질이지 이데올로기다. 가끔은 너무 진심으로 떠들다가 교조적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일장일단이 있다. 형식적인 영혼리스 발표가 줄을 잇는 상황에선 이 점을 진실성 있고 흥미롭게 봐주는 반면, 말 안 통하고 상처 받고 폭망한 적도 부지기수다. 교수한테 "무슨 17세기 계몽주의자같은 소릴 하냐"는 말을 듣기도 하고.

진짜 폭망했던 적은 몇 년 전 산업디자인 전공필수 시간이었다. 곤충을 안 다치게 방생하는 키트를 기획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교수님은 그딴 물건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죽이지 번거롭게 왜 놔주냐, 그런 물건을 누가 사냐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교수님의 회유와 강요로 비슷하지만 정반대인 물건을 만들게 되었다는 건데...그건 바로 파리채! 시발! 이때부터 ID와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매 순간 자괴감 들고 괴로워... 받아본 성적 더 괴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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