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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조용하지만 답답하지 않아요

 

3년 전, 한 중국인 친구 손에 이끌려 교직원 친목 요가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하얼빈에서 온 그 친구는 3개 국어 가능자로, 어학원에서 오랫동안 근로학생을 했었다. 그러다 교직원 샘들과 친해져서 자연스럽게 그 모임에 끼게 됐다고 했다. 들어 보니 요가매트만 준비해 오면 공짜로 강습해 준다는 것 같았다. 그래? 완전 좋지! 얼렁뚱땅 소개 멘트도 준비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교직원은 아니고요, 자취방을 못 빼서 어영부영 학교 앞에 살던 휴학생인데요, 공짜를 아주 사랑하는 휴학생입니다!

수업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말없이 동작에 집중했다. 루틴이 끝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요가매트를 정리하고 나올 때에야 인사할 타이밍이 온 듯했으나, 준비한 자기소개는 영 과하네. 다른 멘트를 고민스레 고르고 있었다. 입을 떼기도 전에, 교직원 쌤은 그 중국인 친구에게 물었다. “왜 혜진이랑 요가를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그 때 친구는 서툰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조용하지만 답답하지 않아요.”

와, 잘 골랐다. 속으로 짝짝짝 박수를 쳤다. 표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내 면전에서 답하기에는 부담스러울 법한 질문인데도 한 치 망설임 없이 한줄평을 남기는 모습이라니. 그런데다 아주 정확하게 내 어떤 모습을 봐 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나는 그 친구에게 충분히 놀랐으므로, 그 말을 걔 입장에선 외국어로 한 거였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알고 지낸 게 고작 한 주 전에 있었던 1박 2일짜리 지방 워크샵에서뿐이었다는 사실은 더해 봤자 더 놀랄 것도 아니었다.

 

요가 모임은 거의 모든 자발적 모임이 그렇듯 두어 달 이어지다가 해산되었다. 나와 그 친구도 한동안 못 봤다. 그러다 며칠 전 우연히 또 다른 워크샵에서 다시 보게 된 거다. 오늘은 마침 작업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기숙사 석식 시간을 지나쳐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됐다. 비도 오고 난 마라탕이 먹고 싶었다.

“마라탕 어때요? 근데 이 근처에 없어서 노원역으로 가야 돼요.” 중국인에게 한국식 신라면 마라탕이란 뭘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진지했다. “맛있어요? 맛있는 곳 알아요?” 현지인이 이렇게 물어오니 나는 망설였다. “아...저는 맛있는데 징업 씨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단호했다.

“그거 맛 없다는 말이에요.”

징업은 대뜸 역으로 제안했다. “멀리 있는 곳 돼요? 비싸고 맛있는 거 먹을래요? 저는 준비됐어요.” “비싼 거? 얼마나 비싼데요?” “둘이서, 오만 원.” 엥, 마라탕집에서 아무리 먹어도 둘이서 오만 원이 나오기는 힘들 텐데. 뭘 먹길래? “샹궈에요?” “아니요, 훠궈.” 핑계거리도 없이 비싼 밥을 먹기가 좀 그랬는데. 

"준비됐어요?"

음...그래! 나는 이번 달 아메리카노를 모두 얼음컵과 카누로 해결하리라 마음먹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건대로 갔다. 가는 길에 그는 오리 장(?)을 꼭 먹어야 한다고 들떠 있었는데, 나는 그게 아무리 맛있다고 한들 입에도 못 넣을 게 뻔해서 조금 걱정이었다.

하이디라오 점원은 보통 둘이서 3만 6천원짜리 세트 하나로 푸짐하게 먹는다고 소개해 줬다. 고기 종류와 야채들을 정하자 그는 아이패드를 가져가더니 고급스러운 사리 두 개를 더해 합 5만원을 딱 맞췄다. 그가 추가한 사리는 메기 살과 다진 새우였다. 푸주하고 중국당면이면 충분했던 나한테는 송구할 지경의 고퀄리티였다. 다진 새우는 점원이 와서 한 점 한 점 떼어 샤브샤브 국물에 익혀 줬다. 메기 살은 익히기 전부터 뽀얗고 윤기가 쟈르르 흐르는 게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았다. 기대했던 오리 장은 안타깝게도 품절이어서 그를 울상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다 먹고 나오는 길에는 어쩜 이렇게 중국에서 먹었던 맛하고 똑같냐며 행복해 했다.)

맛도 맛이지만 그가 점원하고 중국어로 생기발랄하게 떠드는 걸 보는 게 재밌었다. 3년 전보다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한 징업은 이젠 중국발 웃짤이 웃긴 이유도 한국어로 설명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는데 (우리나라 웃짤도 왜 웃긴지 설명하라고 하면 나는 못할 듯)중국어 하는 점원들을 만나니 눈 하나 깜짝 않고 중국인이 되었다. 점원도 아마 중국 분이신지, 먹는 법을 알려주려고 다가와서는 중국어로 그에게만 솰라솰라 알려주고 휙 가 버린다. 나는 어떡해야 하는지 몰라 바둥대면서 그가 도와주기만을 기다렸다. 여기가 어느 나란지 헷갈렸는데, 말도 안 되지만 외국어 잘 하는 믿음직한 친구랑 해외여행 왔다고 생각하니 재미가 마구 솟아올랐다.

 

자양동 온 김에 마라샹궈 재료를 사고 싶다고 했다. 네이버 지도를 켜려 하니까 자기가 안다고 따라오라는데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척척 골목골목을 돌아 중국 식품점에 도착했다. 혼자 들어가면 쫄아서 구경도 잘 못 했는데, 인간 파파고와 함께 골목을 돈 결과 사려고 했던 마라샹궈 재료는 물론이고 찾아 헤매던 마자오하고 분모자 당면도 구했다. 중국 식초(라오천추)는 큰 병밖에 없어서 망설였는데, 징업이 자기가 새로 한 통 산다면서 기숙사에 있는 조금 남은 자기 식초를 줬다(평소엔 라면에 넣어 먹는다고)! 현금 결제했더니 뿌리 달린 싱싱한 고수도 덤으로 얻었다! 해외여행 왔다가 기념품 사 가는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서울에 어지간한 마라탕집은 다 가 본 미식가였다. 현지인 손맛이라는 게 있는지, 둘이 나란히 소스 바에 가서 훠궈 소스를 제조해도 먹어 보면 내가 타 온 거랑은 비교가 안 되게 맛있었다. 내 자리 앞에는 소스 종지가 딱 걔의 2배수만큼 놓여 있었다. 내 걸 찍어 먹어 보고는 말없이 일어나서 다시 타다 줬기 때문에. 

“같이 와 줘서 고마워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징업이 말했다. 나도 덕분에 맛있는 거 먹고 여행 온 기분이라 재밌었다고 했더니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렇게 말했다. “또 가야 돼요.” “오잉? 또 가야 한다고?” 그는 아까 가늘게 만든 눈을 풀지 않고서 답했다.

“오리 장.” 

오리 장은 곤란한데. 아무튼 이 안 살가우면서 살가운 말투가 생각할수록 웃기고 빠져든다. 오랫동안 안 봤어도 가까운 사람은 언제 봐도 가깝구나를 새삼 느끼는 하루였다. 요 며칠 쏟아부은 그래픽 워크샵에서 영어 쓰느라 낑낑대고 오늘은 중국어 못 알아들어서 눈알만 데룩데룩 굴렸더니 여행 욕구가 다 사라졌다. 이것은 어쩌다보니 둘 다 같이하게 된 징업 어학능력의 하드캐리다. 금요일로 워크샵 끝나면 언제 보게 될지 모르겠다. 근데 언제 본대도 또 재미있을 것 같다. 그땐 부디 내가 0개국어는 아니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