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교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강생이란 이런 부류인 것 같음.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는 것까지 수업이다."라고 노예패치 잘 된 사람. 대학 강단이면 올바라야 한다는 판타지 없이 귀 얇고 까라면 까고 로보트처럼 시키는 일 잘 하는 사람. 아마 대학이 취업사관학교일 때 가장 잘 어울리는 교수님인 듯. 애들이 자신을 스승으로 존경하는 게 아니라 자리가 권위인 걸 스스로 잘 아는 사람. 그러므로 점수에 목매는 애들을 5분에 한 번 꼴로 욕하면서 누구보다도 점수로 애들을 부리는 사람.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강의가 공감을 얻고 재밌었으면 가산점 따위로 옭아매지 않아도 알아서 잘들 따라올 텐데, 애들이 집중 안 하고 자고 딴 짓 하는 것에 본인 과실은 조금도 없으시다고 생각하는 건지.
맨 앞줄 모범생이라 많이 참여하고 웃고 손도 잘 들고 A+도 맞았지만 뭘 배웠는지 모르겠음. 교수가 하도 '수업 안 듣고 욕하는 애들'을 원망하셔서 그런지 에타 강의평가에 보니까 수강생들도 '수업 안 듣고 1점 주는 애들은 욕할 자격도 없다'면서 치고받고 있던데. 나는 애들이 수업 안 듣는 건 전부 교수가 재미없는 탓이라고 생각하는 데다 졸음 꾹 참고 열심히 들었는데도 이렇게 욕하고 있으므로 저런 생각하는 애들이란 부자도 아니면서 부자 편 드는 이상한 자한당 지지자같을 뿐.
안 그래도 교수가 '기습적으로' 출석체크를 하고, 농담따먹기를 시험문제에 내고, 자기 마음대로 반영 비율을 바꿔버리고 하는 걸 싫어하는 애들이 많았는데, 기말고사 날 교수가 모두 보는 앞에서 친한 학생 시험지를 손수 지워 주며 틀렸으니까 다시 쓰라고 함(??!), 같은 날 부정행위 목격 제보까지 올라오더니 누군가 교수님께 불만을 토로했나 봄. 그런데 교수는 무언가 오해한 건지 "싸구려 욕망에서 해방되시기를 바랄게요~^^"라고 다 해산된 단톡방에 백수십 명 수강생을 전부 다시 초대해서는 말씀하셨다. 애들은 시험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데 교수가 앞장서서 수업을 장난으로 만들어버리고는 점수에 목맨다며 비꼬는 게 갑질이 아니면 뭘까. 다 그렇다치고 부정행위 해 봤자 성적에 반영 안 되니까 걱정 말라고 하시던데 그러면 애초에 시험은 왜 봤지?
여기까지 그분의 애들 대하는 태도에 관한 얘기였음. 그분의 콘텐츠에 대해 말하자면 그놈의 '인간 본능'과 '아름다움'은 너무 결과론적이라 정체를 모르겠음. 예술을 '고상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워서 모두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아름답지 않은 현대예술은 '주관적이고 애매하고 어렵고 평론가들이나 좋아하는 ^례술^'이라고 뚝 잘라서 논외로 함. 동시에 자기를 어려운 현대예술은 모르는 '일반 대중'하고 등치시키면서 보편을 자처하시는데 "빕스 갈래 광장시장 갈래"에서 빕스 가는 게 보편이라는 거에 난 동의 안 함. 자매품 '람보르기니 대 현기차', '공유 대 지상렬' 식의 유럽 것 vs 한국 것 이분법도 유치함. 서구=보편 깨려고들 난리고 깨져 가고 있구만 '아직까진 서양 게 잘 팔리니까 서양을 따라가자'며 오리지널 유럽 백인으로 못 태어난 걸 아쉬워하는 거 너무 옛날 사람 같음.

"유럽에서 나고 자란 애들이 숨 쉬듯 체득한 문화적 소양을 우리는 구경도 못 해보고 자랐고, 그래서 우리나라 애들은 유럽 애들 못 이겨. 타고난 게 달라.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명품이 안 나오지. "라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만 아... 못 이겨? 아니 왜 이겨야 하지? 명품 브랜드 없는데 그게 왜요?

이 교수 앞에서 "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 받아서 부자 될 생각 없어요. 제 거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들 찾아서 근근히 먹고 살면 충분해요."라고 말했다가는 "배고픈 소리 하는 애한테 배부른 소리 하는 법 알려줬더니, 배고픈 거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배불러지는 법을 알려 줘도 못 알아먹더라"라고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어 할 게 분명. 차라리 우리 과의 어느 교수님처럼 "유럽 가면 여기서 일하는 거 반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빨리 한국 뜨세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입니다."라고 조언하셨으면 솔직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뜬금없이 현실적인 조언이랍시고 기업 면접 잘 보는 법, 자소서 첨삭해주는 법 같은 취업 꿀팁 얘기하니까 대체 저 분은 우리가 어쩌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음. 그래도 대충 듣기에 웃기기는 했다.
어차피 모든 교양은 도때기시장이라서 마음에 드는 것만 쏙쏙 빼 먹고 아닌 건 흘려버리면 그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거니 하면서 나랑 생각 다른 사람의 얘기가 길어지는 거 참는 역치 키우는 거라고, 대학 수업에 기대하는 바가 없는 척 자기기만이라도 하면 좀 덜 빡칠까. 아무쪼록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저 정도로 재가공해서 컨텐츠로 만드는 건 대단하다. 끼워맞추기든 비약이든 그렇게 해서라도 하고 싶은 말이 확실히 있다는 게 어떤 의미로 참 존경스럽다. 내가 동의할 수 없어서 그렇지.
별개로 교수님 너무 엔터테이너시고 가끔은 생각이 시냅스에 닿기 전에 웃겨버리는 엄청난 탤런트의 소유자라 재밌었다. 비판적인데 돈 안 되고 가끔 느끼한 수유 교수님들 강의를 난 더 좋아하지만 상업적이고 웃기고 쉽지만 폭력적으로 단순화된 이야깃거리도 들어볼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않아요. (오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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