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했다. 친구가 최근에 한다는 일에 대해 들었을 때, 비슷한 게 세상에 이미 널렸는데 그걸 또 하냐고 말할 뻔했기 때문이다. 추진력이 대단하다고 하면서 '의미없(어 보이)는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니' 싶어서 조금 더 감탄한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재깍 뭔가 꼬였다는 걸 느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새 홍익인간 이데올로기가 악성코드마냥 깔렸던 건지. 아무 생각없이 생각하니까 내 머리속에서도 저런 생각이 나온 게 소름 끼쳤다.
얼마 전에 재스퍼 모리슨 전시를 보려고 그가 후카사와 나오토와 함께 쓴 <슈퍼노멀>을 읽었다. 둘은 요즘 세상이 디자인 과잉이며 시각 공해라고 혀를 찼다. 난 이제 더 새로울 것도 없는 마당에 무엇을 내놓아야 공해라고 욕먹지 않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는 미대생 한 명으로서, 그 말이 되게 꼰대 같았다. 더이상 아키타입을 꿈꾸지 않는 요즘의 디자이너들이 문제라고 했는데 잘 모르겠다. 억지로라도 비집고 나와서 관심을 받아야 기회가 오지, 두 선생님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셨던 것 아니었냐구요 투덜투덜... 뭐 그 책이 하려는 말은 내실 없이 관심 끄는 디자인'만' 하는 세태가 문제라는 이야기지만, 나로선 그 수준의 지적이 유효할 만큼 충분한 주목을 받으며 성장하는 사람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전시 텍스트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은 더이상 세상에 이롭기를 꿈꾸지 않는다고. 대신 그들의 꿈은 다름아닌 생계 유지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계비도 벌리지 않는 것이 현실인지라, 대부분의 작업은 실질적으로는 자아실현이라 쓰고 자기만족이라 읽는 고것이 목표다. 생산된 창작물은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소규모 커뮤니티 안에서 소비된다.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인 그룹 안에서, 서로서로 지인 물건 팔아 주는 품앗이 식으로 유지된다고 한다. 기억이 맞다면 작년 가을 orgd에서 본 글이었다. 적잖이 충격이었어서 기억에 남았다. 거대 담론은커녕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인들이 팔아주는 걸로 근근히 먹고 사는 게 현실이란 말이.
판 밖이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새우젓 속 새우 주제에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것 자체가 통째로 뜬구름 지향적이었나 싶다. 단군할아버지께는 죄송하지만 이럴 때는 차라리 맹렬히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게 거의 유일하게 멋있을 수 있는 방법인 것 같다. 자아실현을 위해 하려는 일이 남한테 패악질이고 그런 것만 아니라면 뭐든. 지켜보는 입장에선 응원하든가 가만히 있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충분하다. 아마 가만히 있을 이유도 없다. 응원하는 데 돈드는 것도 아니니까. 뭐 기왕 응원할 생각이라면 돈 들여서 응원해주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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