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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삭발한지 일 년 된 후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수업 끝나고 밖에 나왔는데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와서 으으 여름이네. 덥다. 그러고는 단골 미용실에 가서 저 삭발하려구요.” 했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라 별 고민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 게 뭔데?>를 그 즈음 읽었던 것, 그 날 여성학 교양 수업에서 사람이 생기가 있으면 다 예쁜 거지이 얘길 듣고 그래 내가 생기는 좀 많지라고 생각했던 것 정도가 동기다.

 

디자이너 쌤이 진짜 할 거냐고 몇 번 되묻고, 몇 미리로 할 거냐기에 없애 달라고 했다. 평생 볕 못 본 두피와 뒷목이 그렇게 새하얀지 몰랐다. 정수리에 살랑거리는 바람도 난생 처음 느껴 봤다.

 

지인들이 궁금해 했다. “근데 왜 했어요?” 그냥이라고 해도 대부분 믿지 않았다.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몸이 안 좋아요?”, “불교에요?”, 단연 많이 묻는 건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였다. ‘남친이 건강 가족문제 종교적 신념과 맞먹는 무게감인지 갸우뚱했다. 무례한 질문도 있었다. 타 전공 랩에 있었는데, 교수가 너 앞으로 남자는 어떻게 사귀려고 하느냐, 사회에 불만이 많으냐. 혹시 레즈비언 아니냐.”고 꾸준히 물어서 그만뒀다.

 

통상 비체 짓에 따라오는 눈총, 경계, 배척 같은 걸 특별히 못 느꼈다. 헬조선 똘레랑스 이 정도였나, 놀라기도 했다. 근데 이건 내 감각을 믿지 못하겠다. 여동생하고 같이 번화가에 옷 쇼핑을 하러 나갔다가, 동생에게 사람들이 언니 너무 쳐다봐서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전혀 몰랐다. 그 후로 말조심을 한다. 나만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는 상이라 그런지 삭발이 무서워 보이기보단 타조알이라고 귀여움을 받는 편이었다. 두상이 예쁘다, 민머리 잘 어울린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쩌다 발표를 맡으면 남들과는 다른 집중감이 느껴졌다. 혁명가라는 뉘앙스로 멋지다는 칭찬도 종종 들었다. 평생 입을 일이 없을 것만 같던 특이한 옷들이 잘 어울렸고, 이목구비 디테일이 돋보여서 화장을 안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삭발이 일상의 투쟁이 되는 순간은 타조알 때가 아니었다. 애매하게 긴, 야자수, 새끼 새, 기영이, 말년병장 군대컷 때가 제일 고통스러웠다. 남자로 오해받는다. 찜질방에서 남자 탈의실 키를 받거나, 내 얼굴을 본 뒤 목소리를 듣곤 기겁하는 건 예삿일이다. 배꼽 잡는 에피소드가 하루가 멀게 생겨났다. 삭발이 차라리 힙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단계를 참지 못하고 몇 번 더 삭발을 했다. 더벅머리인 내 자신이 못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모자 없이는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당장 드는 생각으론 삭발과 반삭이 비슷해 보이지만 아주 다른 기호인 거다. 삭발은 자의로 하지만 반삭은 그렇지 않다. 강제로 누군가를 삭발시키는 건 엽기적인 범죄지만, 반삭을 강제하는 일은 군대며 학교에서 비일비재하다. 머리를 삭발하는 이에게 우리는 일시적일지라도 대표성과 발언권을 주지만, 머리를 반삭하면 을로 살 준비를 하는 그의 신세를 동정한다. 내가 여자인 것도 한 몫 했다. 비체 게이지 만땅의, 정체불명 경계인이었다. 삭발 두 달부터 반년을 채울 때쯤이었다.) 이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고민해봐야겠다. 

 

반 년 이후부터는 커트가 가능해지는 길이, 숏컷의 범주로 들어왔다. 지금까지 줄곧 예뻐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푸흡 됐다 야, 그 꼴을 봤으니 뭔들 안 예뻐 보이겠냐 하고 웃어넘긴다. 미적 규준에 점점 가까워진다는 뜻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평범해졌다. 일 년이 된 요즘에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삭발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근황 보고) 남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대단한 변화는 없었다. 다만 새내기 때 열심히 사기치고 다녔던 에메필 뽕브라와 압박 나시, 안 입다 보니 불편해서 못 입게 되었다. 힐도 못 신겠어서 스니커즈를 신고, 거기에 어울리는 편한 옷을 주로 입게 되었다. 예쁘고 싶은 의지가 사라져서 맨얼굴로도 밖에 잘 나다닌다. 어차피 사람들은 내가 뭘 하든 (심지어 삭발을 해도) 나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요즘에는 그냥 편하게 하고 다니면서 자기 일 열심히 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남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