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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불량 포크

포크에 겹겹이 찍은 양상추를 한 입 가득 씹은 바로 그때였다. 부정교합인 사람하고 키스하는 느낌이 났다. 자세히 보니 포크의 다리 네 갈래 중에 하나가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입에 넣으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모양으로 삐뚤빼뚤하다. 남의 치열을 처음 건드려봤을 때도 그랬다. 아무튼 내 혓바닥은 주위에 내 치아들이 둘러앉아 있을 때만 둥그렇고 편안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새 포크를 가져왔다. 샐러드를 목구멍으로 씹어 삼킨다. 어제 새벽에 룸메이트하고 했던 얘기를 반추한다. 웃기고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얼굴들을 떠올린다. 저 포크처럼 키스한 게 누구였더라. 모르겠다. 밥맛 떨어지게 이런 생각을 왜 하지. 별 게 다 트리거 노릇을 하네.

기숙사에 사는 일의 특이한 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낯선 동거인을 만난다는 거다. 방에는 두 명 몫의 책상과 옷장, 침대를 놓을 면적뿐이다. 본의 아니게 많은 것을 공유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식습관과 외박 여부, 통화 내용 같은 거. 이건 기숙사의 분명한 단점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나는 매번 어쩔 수 없이 공유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공유했다.

같이 자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나란히 누워 잠드는 새벽을 함께하면 어쩔 수 없다. 이제 막 말문을 튼 룸메이트와 캄캄한 방에 둘이 누워 있으면, 뭔가 비밀스럽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 매정하게 잠들 수 있는 건 1분 후 자동으로 꺼지는 센서등뿐일 거다.

단골 화제는 연애다. 특히 전 남자 친구 이야기. 가만히 듣고 있으면 아직도 남자다운 남자나 남자다운 남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진짜 많다. 우린 다 울 엄마 귀한 딸들인데, 너무 서러웠겠다. 그런데 비밀 얘기는 언제나 기브 앤 테이크가 중요하다. 자기 얘길 한바탕 풀어내고 나면 룸메이트는 항상 나에게도 묻는다. 너는 어때?

나는 준비한 이야기를 꺼낸다. "피라미드 같은 게 있는데..." 허공에 양 손끝을 모아 삼각형을 만들어 보이면서 시작한다. 몇 년 동안 이런 새벽을 겪으면서 내 연애담은 적당한 분량과 구조를 갖춘 에피소드로 진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맨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로맨스인 척 인간의 권력욕과 콤플렉스에 관한 얘기로 정리했다. 재작년부터는 모자이크 처리도 했다.

어차피 익명인 거 각색을 좀 해 볼까 하는 유혹이 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한 마디의 거짓말도 없었다. 그렇대도 내 최근 몇 년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사람이 있다면, 정제되지 않은 말로 떠들어댔던 그때가 훨씬 진실에 가까웠을 거다. 하지만 룸메이트는 너무 재미있게 들어 준다. 알다시피 새벽 시간대에는 웃음과 눈물 인심이 후해지니까.

하필이면 수저통에서 뽑은 랜덤 포크가 불량일 게 뭐냐고 투덜거리면서 생각했다. 벌써 7월도 다 끝나 간다. 이 건물에 사는 것도 올해로 끝, 그러면 9월에 만날 새 룸메이트가 이 피라미드 이야기를 시키는 마지막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내심 신기했다. 기계적으로 외워 둔 것만 빼고는 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더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