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갓 떨어진 아람의 탱글광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며칠이다.
2.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국가 공인 빨갱이입니다." 박태호 교수님은 당신이 쓰신 책 표지만으로 자기소개 PPT를 했다. 페이지 수가 40장에 육박했다.
"제목에서 보시다시피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책이에요. 표지도 빠알갛죠? 저는 토마토입니다."
네 토..뭐라고요? 아무도 웃지 않아서 없던 듯 지나갔다. 애들이 '난 토마토지롱'을 모를 수도 있겠구나. 여러모로 먹먹해졌다.
3. "감옥에 있을 때 사회주의가 망했습니다." 나열된 표지들이 그려내는 지난 삶은 꾸준하고 정연했다. 드라마틱한 좌절과 이상적인 재도약까지, 완벽한 한 편의 자기소개 스토리. 문득 궁금해졌다. 저 사람도 젊었을 때는 닥치는 대로 살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지난날을 한큐에 꿰어 주는 기가 막힌 시각을 얻은 거지. 그게 바로 들뢰즈라고. (만일 그랬다면 카타르시스 오졌겠다.) '허허,,, 에헴,,,' 하는 소략한 말투가 착 달라붙도록 그의 20대 시절을 상상했다. 가진 컨텐츠는 인간미 없지만 어쨌든 그도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불가항력으로 '매혹'당하는 '사건' 같은 것이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책'같은 건 최초에 인식될 때 어떤 감각이었을까. 말하자면 내 나이에 "오 쉬발 나 마법에 걸린 듯해"를 실시간으로 느꼈을까 하는 것.
4. "아니. 그땐 잘 몰랐어. 한 십 년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까 그 책이 그랬었구나, 싶더라고."라고 대답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러면 앞으로의 십 년을 살아볼 좋은 이유가 될 텐데. 물어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음.
5. 아직 9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확신하는 연말 리포트 결과: 올해 우울하다는 말을 가장 높은 빈도수로 떠올렸다. 그럴 때면 한병철이 했던 말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이다. 실제에 비해 비대하게 부푼 자아 때문이다."를 자주 곱씹는다. 꼭꼭 씹으면 마음이 진정된다.
6.
(기운 없이 걸어가는 나)
"안녕하세요! 저 여기 테크노파크에서 일하는데, 시간 되시면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과기대 학생이죠? 몇 학년이에요?"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안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와 이야기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저 몇 학년처럼 보이나요? 맞춰 보세요."
"음, 되게 안정감 있으셔서... 고학년일 것 같아요."
"맞아요. 맞추셨어요. 4학년이에요."
"그렇구나! 전공은 뭐에요?"
"그것도 맞춰 보세요"
"음... 공대생?"
"크크 이건 틀리셨어요. 디자인과에요."
"아 디자인과, 미술 하는 분이시구나."
그는 내 다음 스케줄이 어느 건물 몇 시인지 체크했다. 여유 시간은 5분 정도. 그는 내 속도에 맞춰 부지런히 따라 왔다. 뭔가 죄송하고 고마운 기분. 마주오는 사람들이 나를 '구출해줄까?'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아 나는 더 성의껏 리액션했다.
"미술 하는 친구들은 생각이 자유로워요. 이렇게 말랑말랑한 분들을 보면 예수님 말씀을 더 해드리고 싶은...(어쩌고저쩌고) 항상 좋은 날만 있지는 않잖아요.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고요."
"맞아요. 요즘 너무 우울해요. 졸업 못 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선생님은 진짜 잠깐 말씀 나누는데도 긍정 에너지가 장난 아니세요. 선생님은 무슨 일 하시는지 여쭤 봐도 돼요?"
외워 온 예수님 얘기 말고 그 사람이 궁금했다. 그는 점적으로 활동하는 공산당 레지스탕스처럼(오늘 박태호 교수님 수업에서 들은 말) 임무과 무관한 자기 얘기를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마치 친해지면 곤란하다는 듯이. 강렬하게 나를 자기 세계로 초대하고 싶어하면서도 거리두기 화법으로 말끝을 흐리는 게 묘했다.
"테크노파크에 있는 사업체에서 남편이 겸임으로 일하고 있어요."
"겸임? 겸임 교수님이에요?"
"...그 사업은 제가 지금 하는 일하고는 무관하고요....제가 많이 도와주고... 남편이 허리가 아프대서... 벌써 환갑이다 보니까, 하하, 저도 곧..."
"에에엥 환갑이요? 거짓말! 전혀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없었던 기운이 잠깐 들었다. 아무리 봐도 이모 뻘 같으신데.
"어머... 감사해요. 오늘 들은 말 중에 제일 기분 좋아요. 아니 학생들한테 들은 얘기 중에 제일... 아니 듣는 얘기 중에 좋은 얘기가 있었던가...하하"
포교활동의 비즈니스적 고충. 공감한다고 하기는 좀, 그래도 인간적으로 짠했다.
"진짜 진심인데. 기분 좋다고 하시니까 저도 좋네요."
"하하 고마워요! 학생 저랑 얘기가 좀 통하는 것 같아요. 저희 더 얘기해 볼까요? 슬픈 일 속상한 일을 혼자서 끙끙 가지고 있으면 더 괴로워요. 나누고 들어 줘야 치유가 되죠."
"그래서 제가 기가 막힌 방법을 찾았어요. 블로그를 하는 거에요. 거기에다 쓰면 진짜로 위로가 된다니까요."
"블로그 좋죠. 근데 블로그는 대답해주지 않잖아요. 저희 이따 수업 끝나고 아래 투오브어스에서 만나서 더 얘기해볼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저는 블로그면 충분해요."
"흠, 아쉽네요. 알았어요. 오랜만에 시원시원한 학생 만나서 재미있었어요. 수업 잘 들어요. 좋은 하루!"
쿨하게 떠나시는 이모. 나는 밑바닥까지 기가 빨려 숙사에 뻗어버렸다. 낯선 사람은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