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민은 이 작업을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가이다.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면 하고 안 되면 마는 게 현실이겠지만
아직 그러기까진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한가한 고민을 해 본다.
안 하자니 거슬리고 하자니 끝이 없는 이 것!
얼마나 해야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인가!
먼저 말하자면 하기 싫어서 고민하는 건 아니다. 이거 재밌다. 집중하는 쾌감이 있다. 시각을 이리 예민하게도 쓸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결과물도 한 게 나아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마음이 든다.
"불쌍한 곰돌이 푸!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나아가서는:
얼마나 많은 독자가 이 작업으로 인해 편해지나?
얼마나 많은 클라이언트가 이 작업에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나?
이미 세상에 나온 것들 중, 이게 잘됐을 때 찬사를 받거나 잘못되었을 때 비판받은 책이 있나?
그런 얘기가 오가서 디자이너의 명예나 수입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친 사례는?
이렇게 현타와 재미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나는 좋고 재밌는데, 여기에 에너지를 쓰는 게 의미가 있나, 다른 티나는 일 하는 게 낫나 싶은 것.
조사 방법:
(1) 요스트 호훌리의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를 읽는다.
(2) 이 일을 업으로 삼는 분께 물어본다.
방법 (1)의 결과:
이 책은 "구리다"의 활용형에 대한 보고서다. 시각물을 평할 때 '별로다', '구리다'외 서너 개의 표현으로 돌려막기하다 어휘력의 한계를 느끼는 이라면 이 책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불호를 표현하는 각양각색의 수사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낡아빠지고 유행에 뒤쳐진 / 부자연스럽고 불만족스러운 / 얼룩덜룩하고 불균등 / 구멍이 뻥 뚫린 / 매우 어정쩡해졌다. / 엉터리로 / 울퉁불퉁하고 불안정한 / 어설프게 / 볼썽사나운 /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 논리적이지 않다. / 너무 답답해 보인다. / 비상식적인 /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 바람직하지 않게 망가지는 / 숨 쉴 틈 없이 빽빽한 느낌 / 완전히 엉터리로 보인다. / 눈에 거슬린다. / 너무 비리비리해 보일 것이다. / 벙벙해진다면 / 왠지 생경해 보인다. / 좀 기묘하게 보일 수도 있다...
이렇게 과감하게 호불호를 드러내는 책은 참 오랜만인데, 안타까운 건 이 책이 까고 있는 게 (누가 봐도 구린)보노보노가 아니라 눈 부릅뜨고 봐도 보일까 말까한 0.01pt의 마이크로 타입세팅이라는 거다. 그의 호불호를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사적인 것만 마음에 와 부딪친다. 수신된 건 '강박증', '엘리트주의'라는 인상뿐. 애당초 설득의 영역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 공감하거나 설득당할 안목 가진 사람이면 이미 요스트 호훌리 추종자일 걸...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의 두서 없는 독후감. 솔직히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이 책에서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역자 후기뿐이었다.
"가독성이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에는 원칙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당연히 타이포그래피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하지만 실제로 조판을 하는 장면에 이르러 생각해보자면 정말 우리가 좋은 가독성만을 위해 이 모든 노력을 감내하고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이 모든 과정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다 보면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 지루한 노동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에 대한 답이 오로지 가독성이라면 그건 퍽 허무한 장면이다..."
역자는 이 책을 절대적인 타이포그래피 교과서가 아니라 저자의 취향이 담긴 제안 정도로 읽을 것을 권한다. 그렇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지. 본문에서 이유 모르고 뚜드려맞아 얼얼한 마음을 옮긴이께서 보듬어주셔서 평정심을 되찾았다.
음 그런데 단순히 개취라고 하기에는 이런 비슷할 말을 너무 많이 들었고 규범화되어 있던 타이포 알못의 오래된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살짝 아쉬웠다...
방법 (2)
출판학교에서는 이 일을 업으로 삼는 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물어보면 간단할 문제. 근데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이 짓을 왜 해야 하냐'는 게 요지인지라 무례하고 철없는 질문처럼 안 보이게 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망설이는 사이에 심우진 선생님께서 이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이건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가 아니라 본문 조판에 대한 야기였고 사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러분, 직지를 어디서 찍었는지 아나요? 청주 흥덕사죠. 스님들이 불심으로 한 자 한 자. 구텐베르크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역사적으로 이 일은 신과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이 했어요. 신실한 믿음으로 중노동을 참아내는 거죠. 조판공은 꽤 최근까지도 납 중독으로 단명하는 3D 직종 중에 하나였고요. 그런 일을 오늘날 디자이너가 떠맡게 된 겁니다. 그러니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돈도 얼마 못 벌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여러분이 이 일에 흥미가 있다면, 한번 집중해서 해볼 만한 일이기는 합니다... "
그는 출판학교의 타이포그래피 수업 교수님이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공부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니까 집에 가!'라고 했을 때 진짜 집에 가면 다음날 큰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심우진 선생님의 말씀도 가르치는 사람 특유의 협박성 격려(or격려성 협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잠깐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눈빛이 정말 진심 같으셔서... 나는 곧이곧대로 '신심으로 하는 것까진 아니라면 굳이 꼭 잘할 필요는 없는 것이군....' 하고 믿기로 했다.
이제까지 알게 된 것
- 이 일은 기능(가독성)을 위한 일이 아니(라고 하나같이 뒤로 슬쩍 실토하고 있)다.
- 너무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므로 잘 해야 한다고 권유하기도 애매하다.
- 이 일은 취향이다. 욕심나는 사람만 잘하면 된다.
응? 이게 다라고? 절대 아니겠지...
궁금한 게 한참 남았다. 처음에는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엘리트주의자같은 쎄함을 느꼈다던 사람도 지금 심우진 교수님이 되셨다. 그럼 이 진입장벽을 넘으면 뭔가 마음을 동하게 하는 의미나 매력이 있다는 얘긴데 그게 말로 설명하거나 널리 권하기는 어렵다는 거고. 대체 뭘까? 지금으로선 상상이 안 간다. 계속 알아갈 주제다.
어쩌면... 아 아니다... 확실한거 아니니까 안말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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