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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전시

국립현대미술관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 How Little You Know About Me>

전에는 전시실 1,2에서 올해의 작가상, 3,4에서 종이와 콘크리트 이렇게 두 전시를 했었는데 이번에는 합쳐서 두 배 규모로 하고 있다. 어쩐지 봐도 봐도 끝이 안 나더라. 오늘 꼼꼼히 보려고 했는데 입장해서 2전시실 반쯤 보니까 문 닫을 시간 되어버림. 게다가 전시종료가 모레다... 4월 7일 오픈이었는데 학기중에 좀 올걸.

다른 전시보다 벽에 설명이 자세하게 많이 써 있다. 소책자에 써 있는 것과 같은 글이다. 처음에 전시가 쉽다고 느꼈던 것도 무의식중에 설명을 읽어버린 탓인듯. 그나저나 저 노란색 도형, ASMA? 로 추정되는 알파벳이 무슨 약자인지 모르겠다. 옆에 있는 직원 분들께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 

마크 살바투스 <대문> 2015, 비디오, 작가소장

문이 열리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전부 열리고 나면 닫히는 영상이 나온다. 전시 초입에 잘 어울린다. 이미지는 작가가 사는 마닐라 케손시티의 대문들.

작품에 얽힌 비화가 있다. 댄 브라운(다빈치 코드의 작가)이 자기 작품에서 마닐라를 묘사하는데, 성매매와 환경오염에 찌든 위험한 도시로 그려서 논란이 되었다고 함. 작가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대문 밖에 서서 너머를 상상하는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문짝만 봐도 부잣집인지, 진실은 열어 봐야 아는 것 아니냐는 거. 대문 사진을 모아서 차단과 경계, 사회적 계급에 관한 얘기로 풀어 낸 작업이다. 

최소한의 작업만 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엿보인다. 보다시피 문 일부가 뚫린 디자인이라 너머에 심긴 나무가 보이는데도 그 부분 누끼 추가 작업 그런 거 없음. 기계적으로 모든 사진의 절반을 갈라서 미닫이로 여는 게 전부다. 나는 디테일충이라 아쉬웠다.


요게쉬 바브 <설명은 때로 상상을 제한한다> 2018, 폴리에스테르, 가변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커미션

재밌는 작업이다. 세계 각국의 국기를 한 올 한 올 풀어헤친다. 색색의 실이 병치혼합되어 한 색으로 뭉개지면서 국기가 지녔던 절대불변의 정체성도 해체된다. 국기라는 게 얼마나 징글징글한 설명충이었나를 느끼게 됨. 짜여져 있던 것을 풀어헤치는 행위, 부드럽고 느슨한 물성도 주제와 잘 어울린다. 중간에 태극기로 추정되는 칸이 있어서 찍어 봄.

 

후지이 히카루 <일본인 연기하기> 2017, 비디오, 작가소장

열 명의 사람을 가장 일본인같은 순으로 정렬하기. 키가 커서,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두상이 장두형이라, 패션이 외국인 같다는 이유로 밀려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 보는 사람도, 영상 속 참가자들도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뒤편에 더 뾰족한 문제의식의 비디오 4개가 이어진다. '세기말의 일본인을 연기하는 워크숍'의 일부인데, 식민주의, 인종주의를 소규모로 재현하는 듯한 구도와 상황이라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그나저나 남녀 외모순 줄세우기라니, 시의성 짙은 불편키워드여서 예의주시했다. 빻은 소리 없이 잘 만들었다. 이런 크린한 걸 잘 골라 오는 게 바로 수준 아닐까.


전시 아이덴티티. 2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써 있는 알파벳은 ASPA인가? 몰라서 답답했다.


이곳은 이번 전시 특징인 '연구 플랫폼'

전시라기보단 도서관 같다. 미술관에선 다리 아파도 앉을 곳이 없는 게 다반사인데, 여기서 책 읽으며 쉬다 갈 수 있다. 파티션에 붙은 리서치 패널은 맵 오피스의 <아틀라스 오브 아시아>라는 작품이다. 아시아를 소재로 한 작업들을 소개한다. 서도호와 이불 있음. 근데 다 읽을 자신이 없어서 포기. 검은 소파에 있는 원형의 아이콘과 144점의 판넬을 매치시키면서 보면 된다고 하는데 포기. 

'플루리아' (대륙부터 군도의 경계 지역까지 지역 공동체의 다원성을 아우르는 새로운 개념) 라는 단어를 생전 첨 들어봤다. 꽤 중요한 키워드인 것 같은데, 검색해도 안 나와서 어느 작품이 저 얘길 하는지 찾고 싶었다. 근데 못 찾음. '끊임없이 변화하는 군도를 연출하는' '개방형 설치물'인데 '4채널 비디오'인 작품이 저 공간에서 뭐지? 직원분께 물어 봤는데 답을 못 얻었다.

 

안유리 <불온한 별들> 2018, 3채널 프로젝션, 작가소장

젤 흥미롭게 본 작품. <당신은 몰랐던 이야기>라는 타이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족 인터뷰 음성과 연변 조선족 자치구의 풍경을 엿볼 수 있음. 몇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김연아도, 박근혜도 다 조선족이에요." "그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거리에 적힌 한국어도 중국어도 아닌 언어가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깨진 간판 이미지 너무 멋짐. 


장 쉬잔 <시소미> 2017, 복합 매체, 가변크기

로드킬 동물의 위령제를 지내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묘비 같은 거울 판 앞에는 납작해진 쥐가 한 마리씩 붙어 있다. 일단 사진 속에 찍힌 건 이 정도고, 대만의 장례 풍습과 작가의 개인사, 음악 얘기까지 아주 많은 얘깃거리가 있었던 것 같음. 그래서 좀 어렵다고 느꼈다. 

흥미로운 얘기: 대만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가 평소 살고 싶어했던 집 모형을 만들어서 태우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작가네는 시장에서 대대손손 가업으로 전통방식의 (장례용)집을 만들어 팔았는데, 요즘은 공장제 기성품에 밀려 설 자리를 잃었다고 함. 그나저나 나도 내가 살고 싶은 집 모형을 만들라면 눈앞이 캄캄한데 그게 국가 풍습이라니 어떻게 생긴 건지 엄청 궁금하다.

 

(퍼온짤)사후세계의 행복을 빌어주는 의미로 집과 하인을 종이로 만들어서 태운다고 한다. 근데 저렇게 열심히 만든 걸 태운다고..? 맞게 서치했는지 확신이 없다. 나중에 대만 사람 만나면 물어봐야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새로운 문화.

그나저나 <불온한 별들>의 개 힙한 브금(조선족~ 여러번 갔더니 중독된 듯)이 가벽을 넘어 크게 들려서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됨. 제목이 어렴풋한 기억엔 계이름이었던 것 같다. 장례용 음악 같은 거였는데, 그 정도로 사운드가 중요하면 왜때문에 이 두 갤 나란히 놓은 걸까 생각하던 참에 이정재님이 문 닫을 시간이라고... 언제 다시 갈 수 있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