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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책

후 이즈 힙스터? / 힙스터 핸드북, 문희언, 여름의숲, 2017



p.5 <힙스터 체크리스트>

-서울시 마포구에 산다.

-맥주는 수입 맥주만 마신다. 선택지가 없으면 카스다.

-스파게티라면 이탈리아식 카르보나라 아니면 알리오올리오가 최고다.

-해마다 일본이나 대만 같은 가까운 나라로 혼자 여행을 간다.

-국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제주도이다.

-서핑은 강원도 양양이다.

-이태원은 인스타그램 사람들의 동네라고 생각한다. 굳이 이태원에 간다면 한남동이다.

-최근 가장 즐겨 듣는 건 신해경과 실리카겔이다.

-아이돌은 샤이니, f(x), NCT를 좋아한다.

-페이크 버진이나 김밥레코드가 주최하는 내한공연에 가 본 적이 있다.

-하나 정도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다.

-텀블벅 후원 횟수는 10회 이상이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노아 바움백 아니면 자비에 돌란이다. 웨스 앤더슨은 기본이다.

-언리미티드 에디션 참가 경험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찰스 부코스키, 레이먼드 챈들러 등의 소설을 좋아한다.

-국내 시인의 시집을 두세 권 가지고 있다.

-독립서점이나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수업 수강 경험이 있다.

-페미니즘 서적을 두세 권은 읽었다.

-좋아하는 영화관은 이전에는 씨네큐브, 현재는 한국영상자료원과 상상마당 시네마이다.

-좋아하는 도서관은 정독도서관이다.

-춤을 추고 싶다면 을지로의 신도시로 간다.

-좋아하는 DJ는 DJ 소울스케이프이다.

-빈티지 패션을 좋아한다.

-SNS는 트위터만 한다(인스타그램은 다른 자아로 운영한다)

-홍대 근처에 단골 술집 한두 개 정도는 있다.

-말할 때 자주 물성, 소구하다,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늘 친구가 어디에선가 전시를 한다(친구의 작업실이란 장소가 한 곳 이상 있음)

-마포구에 살지만, 용산구 한남동에 살고 싶어 한다.

-LP를 좋아한다.

-플레인 아카이브를 안다.

-1980년대생 힙스터가 블랙 앤 골드, 환타지아, 마일드세븐, 팔리아먼트(필라멘트라고 부르면 탈락)였다면, 담배 값 인상으로 인해 잠깐 '말아 피우는 담배'로 갔다가 1990년대생 힙스터는 메비우스(마일드세븐이 이름만 바꿨다)와 팔리아먼트로 옮겼다.

-휴대전화는 블랙베리 폰(구 모토로라 사용자)과 아이폰(구 노키아 사용자)이다.

-대림으로 시작하는 장소를 좋아한다. ex)대림창고, 대림미술관, 대림동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시대의 대중문화를 좋아한다.

-최근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독일 베를린이다.

-주말 늦은 저녁 시간을 혼자 보내는 곳은 스타벅스이다.


p.83 한국의 힙스터는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가난하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 다니고 학교에 다니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3,000원짜리 원두커피를 마실 수는 있지만, 매일 좋아하는 카페를 갈 수 없고, 좋아하는 책을 마을껏 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본인이 가진 적은 돈으로 가능한 큰 만족을 느끼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미 인증된 '멋지고 힙한 곳'만을 찾아간다. 

p.84 그렇다고 사실 힙스터를 비웃는 사람이 힙스터보다 더 좋은 취향을 가진 것도, 더 좋은 곳을 가는 것도, 더 많이 아는 것도, 더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영화를 더 보는 것도, 음악을 더 듣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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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으로 쪼갠 편집이 이렇게 설득력있을 수가 없다. 위의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이게 뭐옄ㅋㅋㅋㅋㅋ 하면서 죽 읽다 보면 어느순간 책이 끝난다. 뒤집으면 쪽번호부터 새로 붙은 다른 책이 있음. 좀 당황스러운데, 끝까지 읽고 나면 왜 그렇게 만들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간다. 한쪽은 SNS 허세충의 껍데기를 관찰하고, 한쪽은 좋은 취향 소유자 집단의 뿌리부터 파헤치기 시작함. 접근방식부터가 정반대다. 이건 등돌린 두 권의 책일 수밖에 없다.

힙하다는 단어를 종종 쓰면서도 힙스터가 뭔지 몰랐다. 체크리스트 속 항목들이 너무 낯선 걸 보고 새삼 진짜 몰랐구나를 느꼈다. 거의 해당사항 없고, 해당되는 몇 개도 아마 문제가 기대한 맥락하고는 딴판일 것 같다. 최애 파스타 알리오올리오지만 만들어먹기가 간편한 게 좋을 뿐인 거라. 내 기준에서 뭔가 유행의 최첨단처럼 보이는 것들을 힙하다고 불러 왔는데, 통상 힙한 것에이렇게 문외한이었다니 디자인 전공자로서 공부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힙스터라는 단어에 어쩐지 SNS 허세충의 뉘앙스가 있는 것은, 애초에 이 단어가 우리나라로 수입될 때 홍대 앞 젠트리피케이션의 피의자라는 맥락에서 소개되었던 게 한 몫 했다. 필자가 직접 가서 본 포틀랜드와 일본의 힙스터들은 진보, 환경, 지역경제에 관심을 갖고 지속가능한 취향을 추구하는 이들로, 내가 아는 그 힙스터와는 괴리감이 컸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뼈때리는 지적은 이것. "취향을 만드는 데는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 선진국의 힙스터들에 비해 우리나라의 80-90년대생은 둘 다 없다."

그래서 체크리스트처럼 유형화된 '힙', 과시를 위해 힙스터의 취향을 모방하는 취향도둑, 그를 비웃는 취향나치의 사이버불링이 이어진다. 하지만 개취란 게 명백한 우열도 없고 한결같은 것도 아닌지라 힙스터의 정통성 논란은 단순한 유희로 끝나기 마련이고, 제일 중요한 건, 동기가 허세든 과시든 아무렴 어떠냐는 거다. 관심과 시간을 투자해 계발한 비주류 취향을 널리 알리는 활동은 어찌됐든 대중 취향을 풍요롭게 만들 텐데. 

마지막 문장이 멋있다. "누가 나에게 본인은 힙스터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힙스터가 아니면 누구도 힙스터에 신경 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