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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책

잔혹함에 대하여: 악에 대한 성찰



잔혹함에 대하여: 악에 대한 성찰

애덤 모턴 지음/변진경 옮김

돌베개, 2015.


살인마나 소아성애자를 악마라고 욕하는 일에 비하면, 그의 동기를 이해하고 나조차도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일은 무척 거북하고 어렵다. 필자는 이 사고실험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 책을 거의 통째로 바친다. 영화 속 인물과 역사적 사실을 넘나들며 온갖 예를 드는데, 이게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방향성이 모호하고, '그런 사람도 있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다' 식의 서술이 우유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무튼 예시들이 재미있는 것만으로도 읽은 보람이 있다. 제목이 진지하고 어려운 본격 철학 서적처럼 보이는 것은 좀 어색하다. 

표지가 멋지다. '악'이라는 글자를 색 없이 레터프레스로 찍었다. 다 읽고 나면 내용에 힘입어 더욱 멋져 보임.


1.  악, 평범하지만 특별한

우리는 흔히 너무 끔찍하고 잔혹한 사람을 두고 악마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필자는 악이라는 개념이 실제 존재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악'이라는 단어는 증오, 무시, 이해 불가의 어휘군에 속한다(p.17)." 

악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나를 상상하는 일이 자아존중감을 위협하고, 악한 방식의 사고회로를 활성화하고 싶지 않으며, 악인을 이해하는 노력이 자칫 가해자에 대한 혐오감을 약화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이 불가사의하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인 양 반응한다. 통상 사용하는 악이라는 표현에도, 악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고 세계의 불행 중 상당수가 매우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는 사실을 외면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진정한 위협은 이것이다. 악의 개념을 가정하고 사고하다보면 어느새 악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 악인은 피해자가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가치 없는 쓰레기나 열등한 존재 또는 위험할 만큼 이질적인 대상이라 여긴다. 사실 그(악인)는 피해자가 악하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악의 개념을 가정하는 사고는, 각별히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잔혹 행위의 공범자로 만들지도 모른다(p.20)" 는 언급은 이 책의 핵심 통찰이다. 누군가를 악마로 낙인찍고 대화를 거부하며 오직 비난만이 합당하다고 여기는 태도는, 살인자나 소아성애자가 피해자를 '당해도 싸다'고 여기는 심리와 평행한 것이다.


필자는 불분명한 악 개념을 가다듬으며 잘못과 악을 구분한다. 필자가 제시하는 다음의 세 가지 사례는 기본적으로 악이 아니라 잘못이지만, 정보가 추가됨에 따라 악한 행동으로 보이는 경계에 서 있다.

1) 나는 기아 구호 활동 담당자이다. 사막에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투하해야 할 비행기의 연료를 잘못 관리했다. 부주의하게도 부패한 군부가 빼앗아갈 수 있는 장소에 연료를 보관했던 것이다. 비행기는 뜨지 못하므로 식량은 전달되지 못하고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 나는 사람들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본부 관리자들은 나를 계속 고용해야 할지를 심각히 고민한다.

:나는 비난받을 만하지만 단지 실수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와 관련된 일에는 매우 세심한 반면 다른 사람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는 상당히 태만하다는 게 밝혀진다면, 나의 행동은 악의 냄새를 짙게 풍기게 된다.

2)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신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그는 전 세계의 궁핍한 어머니들에게 자녀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양육권을 교회에 맡기라고 설득한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몇 년 후 어머니들은 아이를 포기한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아이들은 공허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을 뿐이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일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 그의 행동은 잘못이지만 악하지는 않다. 호의였고, 자신의 행동이 불행을 야기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미칠 영향을 알면서도 오직 교회의 교리만을 스스로 되새기면서 그 중요성을 외면했다면 악의 협력자가 될 수 있다. 

3) 나는 제약 회사 경영자이다. 획기적인 항암제 특허권을 소유하고 있다. 경쟁 회사도 유사한 효능의 약을 가지고 있지만 그쪽 경영자는 우리 회사와 달리 세금을 피할 수 있는 세법상의 미묘한 허점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정부가 이 허점을 보완하기까지는 5년이 걸리고, 이 기간을 이용해 나는 경쟁사를 견제하며 이윤을 극대화하는 복잡한 경영 정책을 펼친다. 이 게임이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한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너무 바쁘고 오직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자신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면, 그는 결함이 많은 사람이고 잘못을 저질렀지만 동기는 악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가끔 자신의 행동이 타인의 죽음을 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경쟁사와 벌이는 복잡한 경합에 전념하면서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 노력했다면 그는 악하다.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게 할 만한 생각과 가능성을 회피하는 자기기만 전략은 중대하고도 널리 퍼져 있는 악이다.


잘못과 대비되는 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능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잘못된 행동에는 화가 나지만, 악에는 초자연적 공포를 느낀다. 둘째, 피해자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일부러 외면하는 특수한 고의성 아래 이루어진다. 셋째, 악의 피해자는 대개 악이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는 관점을 갖는다. 나한테 어떻게 그런 행동을? 이 관점은 피해자가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하다고 자책하는 경향의 원인이기도 하다.

일례로 강간이 악한 이유는 두 번째 이유, 피해자를 모욕하고 한낱 대상으로 낮추려는 욕망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덧붙이는 사례는 흥미로우면서도 악의 핵심을 명확하게 한다.

"한 여자가 남자와 섹스하기 위해 거짓으로 그를 설득한다. 그녀는 자신이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그 남자와의 섹스를 생의 마지막 기억으로 갖고 싶다고 말한다. 나중에서야 남자는 여자가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그녀가 소중한 순간을 원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관심을 끈 남자의 몸을 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는 강간당했다고 느낄까? 대부분 사람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남자는 기만당하고, 함부로 다루어졌으며, 이용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가 당한 일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악하지는 않다(p.32)"


2. 악의 장벽 이론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폭력적인 행동을 꺼려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전체 인류의 존속을 위한 본능이다. 필자는 이것을 '악의 장벽'이라고 부른다. 타인을 모욕하거나 해하는 행동들은 이 악의 장벽을 뛰어넘어야만 가능하다. 보병 전투 시에도 적병 개인에게는 절대로 발포하지 않는 병사가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 것을 보면, 장벽 넘기는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특별히 쉽다. 

폭력적인 행동을 쉽게 할 수 있는 첫 번째 유형은 '취약한 자기중심주의자'이다. 우리는 흔히 자존감 낮은 이들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폭력적인 사람의 자존감은 높게 과장되어 있다. 폭력적인 강간범은 자신이 섹스의 달인이라고 믿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자신이 자식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그러나 근거가 빈약한 것이 약점이기에 이들은 다른 이들로부터 존중의 표시를 얻어내는 데 집착한다. 때로는 이것이 타인의 두려움이다. 취약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은 자기 가치의 불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해 악의 장벽을 넘는다.

둘째 유형은 소시오패스이다. 공감 능력의 결여가 특징이다. 폭력적인 사람은 금지를 밀쳐내거나 우회하지만, 이들에게는 처음부터 금지 자체가 없다.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을 독자들을 위해 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신의 아이가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고, 당신은 아이를 돌본 지 하루 만에 비축해둔 공감력이 모두 소모된 상태였다. 하지만 좋은 부모라면 공감, 격려,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그런 감정들을 최대한 많이 표현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순간이 빨리 마무리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때 당신이 대부분 이런 식으로 꾸민다고 상상해보라. 상상이 미치는 그만큼, 소시오패스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 일부나마 상상하는 것이다(p. 90)" 

이 두 유형에 해당되지 않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해로운 행동을 걸러낸다. 필자는 차 안에 차 키를 두고 문을 잠가버린 사람을 예로 든다. 그는 차 유리창을 부수거나, 정비소에 전화를 걸거나, 집에 가서 스페어 키를 가져오는 방법 중 무엇이 나은지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지나가던 행인의 머리채를 잡고 차 유리를 깨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타인을 해하는 행위를 꺼리는 인간의 본성, 즉 악의 장벽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악한 동기의 본질은, 고려하면 안 되는 행동을 막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악한 행동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이 선택할 행동들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위해와 모욕을 금지하는 의무적 장벽을 회피할 수 있는 전략 또는 학습된 절차를 통해 행동을 결정할 경우, 그 행동은 악하다.(p.98)" 그러니까 결과를 알면서도 계획적으로 자신을 속여가며 하는 나쁜 짓이야말로 악하다.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자기기만을 통해 악에 연루된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많은 독일인들은 아마도 그들 대다수가 살인하지 않고, 약탈하지 않고, 이웃을 죽게 하지 않도록 하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p.101)"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는 악한 성격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째, 소시오패스(장벽이 아예 없음). 둘째, 폭력화된 사람(장벽을 피할 방법을 학습해서 필요할 때마다 활용함). 셋째, 장벽을 무력화하는 문화적 토양에서 신념 체계가 형성된 사람(ex. 노예제 사회의 개인들) 넷째, 위반을 용이하게 하는 신념 체계와 사고방식을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ex. 사이비 교주).


3. 악몽 그 자체인 사람들

이 장에서 가장 눈여겨 본 질문은 이것이다. "민주주의 국가가 거대한 규모의 집단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두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중 한 가지만 옮긴다.

"극빈에 시달리는 이웃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가 있다고 하자. 부유한 국가가 이웃 국가들에 닥칠 비극적 기아를 막으려면 국내 제품의 상당량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곤란과 결핍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부유한 국가의 사람들은 앞으로 이웃 국가를 원조하면 기아 문제가 더욱 심화되어 의존 상태가 초래되리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립이 유일한 빈곤 해결 방안이라고 생각하므로 이웃 국가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는다. 그 후 이웃 국가들에서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다. 부유한 사회의 구성원들 다수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원조는 상황을 악화할 뿐이다'라고 자기 주문을 반복하면서 불간섭주의 정책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모든 학교에서는 불간섭주의의 유익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간섭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탈출구인 자립을 제거하려 한다는 점에서 살인자만큼이나 나쁘게 묘사된다. 기아를 다룬 텔레비전의 생생한 보도는 금지된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한 세기가 지난 후, 무수한 고통스러운 죽음에 책임이 있는 부유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공포에 떨면서 그 죽음을 돌이켜본다(p.144)."

개인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들려서 소름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전체주의 광풍은커녕 민주적 제도와 인권 의식을 다 갖춘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발현될 수 있다는 건데... 상상만으로도 오싹하다.


4. 악과 대면하기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럽고 관습적인 감정은 분노, 증오, 응징 욕구다. 이 장에서는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악을 대면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앞서 말했듯 악행을 불가해한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대신 악한 사람이 잔혹 행위 금지 장벽을 넘는 방식을 상상하고 이해해야 한다. 장벽을 넘는 방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만 옮긴다. 자기 이미지를 끊임없이 되뇌이며 자기최면에 빠지는 것이다. 자신을 로빈 후드나 인디애나 존스로 생각하는 마약 밀수꾼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스워 보인다면, 같은 기제를 설명하는 끔찍한 예시도 있다. 필자는 한나 아렌트를 인용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는 자신의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아니라 정상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받는 신체 앞에서 느끼는 동물적 연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였다. 힘러가 사용한 수법은 (중략) 말하자면 이러한 본능을 뒤집어 자기 자신에게 향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했는가!'라고 말하는 대신, 그 살인자들은 '나의 의무를 이행하면서 나는 얼마나 끔찍한 일을 목격해야 했는데, 내 임무가 내 어깨를 얼마나 무겁게 짓눌렀는가!'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p.191) 나는 이 문단을 읽고 나치 부역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필자는 악의 이해를 뒤이을 발전적인 대처 방식으로 화해를 꼽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의 사례를 언급한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무너졌을 때, 수십 년간의 공포를 겪고 갈라선 사람들이 어떻게 국가 정상화를 위해 협력할 수 있을지 우려가 컸다. 과거사에 대한 보복 행위가 벌어져 예전 권력층을 표적으로 삼는 새로운 잔혹 시대가 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정권 교체 이후 몇 년 만에 그 위험에서 벗어났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평가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핵심적 발상은 관련자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위원회에 출석해 억압적 통치 기간에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한 것이었다. 위원회는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다른 증인들을 소환할 수 있었다. 지원자가 위원회의 조사 활동에 진실하고 화해를 이끄는 태도로 임했다고 판단될 경우, 위원회는 지원자가 과거 행위로 형사 고발되지 않도록 사면을 허락할 수도 있었다(p.200)" 잔혹 행위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보복할 권리를 포기한다라, 나로서는 이런 발상이 사회적 지지를 얻는 것은 영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물론 진실화해위원회의 사례는 이례적으로 성공적인 것이다. 이를 모방한 여러 국가들의 화해 시도는 반목과 방해 공작으로 물거품이 되거나, '승자의 정의'에 따른 명목상 화해(ex. 2차대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와 집단 망각으로 이어졌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화해는 용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행동을 이젠 잊고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내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절대 잊거나 용서할 수 없는 사건도 있다. 하지만 화해는 다르다. "사람과 화해한다는 것은 그를 미래의 공동 기획에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며, 협력을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을 적대감이나 모욕감을 밀쳐둔다는 뜻이다(p.208)." 절대로 과거의 잘못을 떨쳐버리고 친하게 지내라는 것이 아니다. 화해했더라도 끝내 용서받지 못할 사건도 수두룩하다. 홀로코스트처럼. 

일상적 차원에서 분노와 증오는 자연스럽고, 복수조차도 통쾌한 '사이다 결말'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과오를 인정하고 화해하라는 제안은 일견 도덕군자처럼 보인다. 상처가 클수록 분노도 크다는 말 역시 타당하다. 그러나 지금 다루는 악한 사건들은, 통쾌할 만한 수준으로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살인 행위에 대한 분노는 살인자를 죽이는 것으로 확연히 표출된다. 그러나 목숨은 오직 한 번만 뺏을 수 있으므로 집단 살인이나 유난히 잔혹한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에 비례하는 대응 방식을 찾을 수 없다(p.216)." 복수의 대안으로 화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결론은 소박하다. "화해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그 제도의 의미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p.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