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탐구생활/책

타자의 참맛: 한병철의 에세이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한 생각


A: 아 연애하고 싶다.

나: 누구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A: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시시콜콜한 얘기 뭐든지 해도 들어 줄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나: 그 얘기, 내가 들어 주면 안 되는 거야?

A: 그거랑은 느낌이 달라.

나: ???


나: 오래 만나도 시시콜콜 뭐 하는지 얘기하고 궁금하고 그래?

B: 아니. 초반에는 그렇게 다 얘기했었는데, 감정쓰레기통짓이지.

나: 근데 왜 다들 연애한다고 하면서 그런 걸 하고 싶어하지?

B: 멋모르고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나는 너를 이만큼이나 사랑한다를 그런 식으로 과시하고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이십 대 초반에나 그러지 앞으로는 못 그럴 듯...


나: 나도 내 사소한 얘기를 어디다 떠들고 싶은 욕구로 티스토리를 해.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걸 주변인 중 특정 한 명에게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더라고. 또 상대의 아주 작은 생각들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기를 바라고. 보통 연애 상대를 그렇게 생각하더라. 내가 생각하기에 저건 사랑하는 사이에서 할 만한 계약은 아닌 것 같아서 의아해. 왜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부탁할까? 일기장에 쓰든가 이렇게 블로그를 하면 쉬울 걸 말이야.


한병철: 타자를 그의 다름이라는 면에서 경험하게 하는 이격성을 예의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는 예의바름이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 미디어에 의지하여 타자를 최대한 가까이 끌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가깝게 만들기 위해 타자와의 거리를 파괴하려 한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타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나: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뭐해 어디야 24시간 감시하고 tmi까지 모조리 공유하는 건 어렵지 않지. 근데 그런다고 그 사람의 전부를 알 수는 없고, 그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타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말에 공감이 가. 이 책은 오늘날의 사랑이 타자를 보전하는 '에로스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지적해. 사랑은 본디 편안하고 안락한 게 아니고, 그런 쉬운 사랑은 현대사회의 발명품일 뿐이라고 하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얼마 전에 봤던 게 생각나. 처음에 든 생각은 저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거였어. 사랑이란 말보다 잘 어울리는 단어를 고르자면, 베르테르가 로테의 말 한마디를 부풀리고 두려워하고 실망하는 무한 루프를 '불안', 강렬한 사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살을 선택한 일을 '자의식 과잉', 그 일을 로테에게 부득부득 알리는 퍼포먼스를 해 살아 있는 사람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민폐갑' 으로 정리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내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모습을 <에로스의 종말>에서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더라고. 


한병철에 의하면 사랑 즉 에로스는 타자성에 대한 경험이야. 그리고 이렇게 경고해. "사랑을 안락함이라고 오해하지 마라. 안락함을 느끼는 것은 타자를 소비하는 일일 뿐이다." 그것은 타자를 동일자 취급하고 착취해서 얻은 나르시시즘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거야.


로테와 베르테르의 관계도 그래. 안락함이 없어. 로테가 하는 어장관리 같은 언행은 베르테르에게 어느 한 순간도 확신을 주지 않고 멘탈 갈리게 만들잖아. 이 책의 언어로 말하면, 베르테르의 사랑에 확실하고 긍정적인 것들이 주는 편안함은 없어. 대신 부정성이 지배해. 나는 로테 마음 몰라, 나조차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파악되지 않고 내 컨트롤 범위 밖에 있는 타자이자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거지. 


에로스적 경험은 타자에게 자아 일부를 내어주게 하는데 이것은 자기 세계 기준으로는 분명히 약해지는 일이야. 하지만 한병철은 '그러한 과정에는 특별히 강하다는 감정을 동반한다.'고 말해. 베르테르의 자살이 마냥 나약해 보이지만은 않는 이유가 이런 거지. 알베르트와 논쟁하는 장면에서 베르테르가 자살은 진정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베르테르의 자살은 타자에게 자아를 내어주는 에로스적 행위의 연장선이야. 블랑쇼가(그리고 이진경 교수님이) 말하는 '비인칭적 죽음'이 핵심이고, 생물학적 죽음은 부수적인 요소일 뿐인 게 돼. 사랑이란 게 되게 위험한 일이구나.


한병철: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중략) 오늘날의 사랑에는 어떠한 초월성, 어떤 위험도 없다.


나: 우리가 하는 안락한 사랑의 거의 모든 실천은 소비사회의 기획이 맞아. 제대로 데이트했다는 생각이 들려면 비싼 밥 멋진 카페를 가야 하고, 물질적인 걸로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잖아. 물질적인 것에는 육체도 포함일 거고. 무슨 체크리스트가 있는 것 같아. 사람만 바뀔 뿐이지 실제 하는 일은 매번 똑같아. 베르테르의 미친 것 같은 사랑하고는 한참 달라. 너무 쉽고 편해. 쇼핑을 할 때도 물건값이 너무 싸면 의심해 보는데, 사랑도 사기인 거 아닌지 따져봤어야 했어. 이 책은 그 사기 수법과 빅픽처를 꼬집고 경고하는 내용이야. 그런데...


한병철: (헤겔 얘기 중이었음) 절대적 결론은 타자 속에 한동안 머문 뒤에야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찾아온다. 변증법 자체가 끝맺고 열고 다시 끝맺는 운동이다. 결론을 맺을 능력이 없다면 정신은 타자의 부정성에 상처 입고 피를 흘리며 죽어버릴 것이다. 모든 결론, 모든 끝맺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맺고 우정을 맺는다. 우정은 하나의 결론이다. 사랑은 절대적 결론이다. 사랑은 죽음, 즉 자아의 포기를 전제하기에 절대적이다.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57쪽).


나: 읽다 보면 의문이 생겨. 사랑이 사기라는 것까지 알겠다고 쳐.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자아의 포기? 척 듣기에도 보통 일이 아니야. 아니 그럼 마음고생 오지게 하다가 멘붕 와서 자살해야 진정한 사랑인가?


이 같은 질문을 배운 사람이 말하면, (11쪽 서문, 알랭 바디우 <사랑의 재발명>)


바디우: 타자에 대한 소비주의적이고 계약주의적인 관계의 반대편에 올 수 있는 것이 오직 타자에게로 들어가는 통로를 열기 위해 자아를 파기한다는 거의 도달 불가능한 숭고성뿐일까? 반복적인 개인적 만족감이라는 조악한 긍정성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오직 절대적 부정성뿐일까?

바디우: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막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사랑은 잠정적으로만 부정성의 절대적 시련, 즉 타자를 위해 자아를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일 것이다. 


나: 맞아, '잠정적으로만'이 중요한 것 같아. 사실 베르테르 같은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기에는, 그간 알던 사랑(에 아무리 문제점이 많다지만)하고 괴리감이 너무 커서 '에로스적인' 것을 사랑하고는 별개로 한병철이 임의로 만든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단 말야.


바디우: 어쩌면 충실한 사랑이란 실제로 진정한 공유를 위한 두 망각 사이의 결합, 애써 힘들게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둘의 교합일 것이다.


나: 내 밖에 있는 타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말대로 교집합 밖의 것을 애써 힘들게 망각하는 과정이 필요할 거야. '그댄 내가 아니니 내 맘 같을 수 없는' 게 당연하니까. 이해하든 참든 못 본 척하든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 사실 이 글은 충실한 사랑에 대한 연애지침서가 아니라서 어떤 지침을 기대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 같아. 대신 현대사회에 일침 놓는 책이지. 타자가 사라지고 있으니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이야. 세상이 알려준 대로 사랑하다가는 평생 타자의 참맛을 모르고 죽을 테니까. 


바디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병철의 주목할 만한 에세이를 읽는 것은 고도의 지적 경험이며, 이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투쟁 가운데 하나에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랑의 수호, 혹은 랭보가 말해듯이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이다.(12-13쪽)'


-----

한병철의 에세이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서 드는 생각들을 반말로 썼다. 그전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서 이게 대체 뭔 소리인지 내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멍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베르테르에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타자가 소멸하는 징후였다. 비연애 인구 1인으로(책이 말하는 사랑이 연애 한정은 아님)사랑이라는 단어가 퀴퀴하고 진부하게 느껴졌었는데 깨닫는 게 많았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그래서 대책이 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다. 대책 없이 지적만 했어도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함. 포르노그래피, 이론의 종말 꼭지는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책 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