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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자취썰) 내게 유해한 사람

 

is 건물주 아주머니...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던 때 얘기다. 막학기 때 에타에다 썼던 글이 스크린샷 폴더에 있어서 기억났다. 뭇 자취러들의 동정어린 댓글을 많이 받았다.

그 글을 썼을 시점에는 화가 나 있었다. 친구가 자기 사는 원룸 집주인 욕을 실컷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살던 그 집이었기 때문이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어! 더이상의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글을 썼다. 원룸 초성을 깠더니 댓글에 그 집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다. 역시 그 집, 이상하긴 이상했다. 특히 그 아줌마. 돌이켜보면 그는 나를 예뻐했지만 나는 그 집주인 때문에 자주 불편했다.

 

첫 번째. 관리비 사건. 계약할 때 '쓰는 만큼 나와요'였던 그 집은 난방이 중앙제어였다. 바닥 난방 스위치는 집집마다 있는데 온수 보일러가 층마다 한 대뿐이라 매달 가스요금을 n빵해서 내는 시스템. 집 구할 때부터 알고 있었고, 크지도 않은 방 하나에서 난방비 나와봐야 얼마나 되겠나 하고 별 신경 안 썼었다. 다만 거슬리는 건 정산서의 생김새였다. 집주인이 취합해서 계산한 정산서를 현관문에 붙여 놓고 가는데, 정산서래봐야 A4용지에 대충 뽑아서 서툴게 자른 손바닥만한 쪽지에 불과했다. 테두리가 비스듬하게 잘린. 시장놀이용 돈만큼이나 장난스러워 보였다. 거기 적힌 금액이 정확하고 투명하게 계산되었을 거라고 믿는 건 불가능했다.

마침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었다. 합계 금액이 지난 번이랑 똑같이 몇만 몇천 '666원'인 거였다. 분명 두 달 전에도 666이었다. 그때 그 정산서를 받아보고 '666'이라니 집주인 일루미나티 아니냐? 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송금 내역을 확인하니 금액이 똑같았다. 거 봐, 내가 이거 엉터리일 것 같다고 했지. 나는 난방 열사 김부선의 기세로 건물주 집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침착하려 애쓰면서 지난 번 고지서하고 금액이 소수점까지 똑같아서 그런데 오타가 의심되니 확인해 볼 수 있을지 물었다. 말은 오타 확인이라고 했지만 속으론 난방비 비리를 의심하고 있었으니 말끝에 묻어나는 적대감을 못 감췄을 거다. 집주인 아줌마는 당당하게 고지서 뭉텅이를 던져 주며 못 믿겠으면 직접 계산해보라고 했다. 날이 많이 풀렸는데도 집에서 경량 패딩을 챙겨입고 계시던 건물주 부부는 내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내내 당신처럼 알뜰하게 살면 몇 푼 안 나오는데 학생들이 펑펑 써 대니 그만큼 나온 거라고 잔소리했다. 그런데 계산해 보니 2천 몇백 원을 더 받았다.

아주머니는 태도를 바꿔 바로 사과했다. "아유 그랬어? 학생, 미안해. 우리 아들이 계산한 건데. 실수했나 봐." 401호 학생이 참 꼼꼼해서 좋다며 큰일날 뻔 했는데 덕분에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나도 비리라기엔 애매한 소액이라 일단 넘어갔다. 말대로 사람이 실수야 할 수 있다지만, 언제부터 주먹구구식으로 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고작 2천 원 때문에 매번 찾아갈 수도 없고. 의심해봐야 나만 지치는 일이라 단념했다.

이 사건 이후로 아주머니는 나와 내적 친분을 쌓은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탈 때 내 옷차림이나 안색이 어쩌네 꼭 말을 걸었다. 택배박스를 북북 뜯어 납작하게 접고 있을 때 다가와서는 아유 기특한 401호 학생, 분리수거장에 나타나선 배달 용기 씻어서 버라는 것도 401호 학생밖에 없다며 며느리 삼고 싶다고 칭찬했다. 분위기 망치기 싫어 애매하게 웃었다. 칭찬이잖아 칭찬. 하지만 그때 차라리 싸가지없이 굴었어야 했다.

 

한번은 자는데 누가 인터폰을 울리길래 안 받았다. 그랬더니 현관문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집주인 아저씨가 들어왔다. 아니, 벗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겪어 보니 황당하고 무서웠다. 아저씨는 벌컥 역정을 냈다.

"아이 씨. 학생은 방에 있으면서 문을 왜 안 열어?"
"사람 없는 것 같으면 항상 이렇게 따고 들어오셨어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더니 보일러 고치러 온 거니까 자기한테 뭐라하지 말랬다. 예예. 알겠는데 다음부턴 전화라도 주세요. 그러고 사람들 갈 때까지 이불 속에서 폰만 만졌다. 어색하고 애매한 시간. 그러고도 또 왔는지 하루는 학교 갔다 오니까 책상 위에 쪽지랑 야쿠르트가 놓여 있었다. 좀 소름...


세입자 집에 함부로 문 따고 들어오면 경찰 신고 감인 거 나도 안다. 그런데 집주인하고 관계를 나쁘게 만들면 피곤해지는 것도 나다. 도어락 설치도 고민했으나 문에 구멍 뚫는 거 아니냐, 방 뺄 때 문짝을 교체하든지 도어락을 두고 가는 조건으로 설치하라고 했다. (치사하고 얼마 못 쓸 게 아까워 안 했는데 그때라도 했었어야 했다!) 아무튼 쪽지 내용은 방 깨끗히 써서 이쁘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이었다. 며칠 뒤 아줌마가 다시 노크했다. 이번에는 손에 들린 게 야쿠르트가 아니라 헬리코박터 프로젝트 윌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학생, 내가 부탁이 있는데..."

요지는 방을 비워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신 딸이 근처 병원에 취직했는데 내 방에 살게 하고 싶다는 것. 그럼 나는 어쩌냐고 하니 당신 집(같은건물)에 딸 살던 빈방이 있는데 거기 와서 살라고 하셨다. 월세는 반만 받으시겠다며. 나는 드러누워 허공에 발버둥치며 땡깡부리는 단비 포즈로 "아! 싫어요! 저 여기 이 방살거에요! 안 나갈거라고요! " 이랬다. (진지하게 싫다고 하여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므로 선택한 고육지책...) 아줌마는 피식 웃으면서 알았다, 마음 바뀌면 전화하라고 하고 가셨다. 다시 생각할 가치도 없이 No!

아줌마는 그 얘길 더 하진 않았고 나도 오죽하면 나를 당신 집에 들이려고 했을까 싶어 남은 계약기간만 잘 지내려고 했다. 그런데 새 세입자 구할 시즌이 무례의 절정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문을 두드렸다. 복도에서부터 401호 어쩌구 하며 열쇠 꾸러미 짤랑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노크는 구색이다. 현관에 나가서 문을 열어드릴 필요도 나중엔 없었다. 네에, 하면 어 학생 안에 있어? 잠깐만~ 하고 쳐들어온다. 일가족을 몇 명이나 데리고 좁은 방 이곳저곳을 들쑤신다.

" 아주 윤이 나게 치우고 산다니까. 너무 기특해~"

라고 말하며 내 싱크대 찬장까지 열어 보였다. 사람들 몰고 올 때마다 귤 하나, 야쿠르트 하나. 지난 번에 주신 것도 못 먹어 냉장고 계란 칸에 줄을 세웠다.

방에서 담배도 좀 피고, 일쓰에 음쓰도 팍팍 섞을 걸! 평소 딱히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고 그냥 물렁물렁한 사람이면 뭐 어떠냐는 주의였는데 그렇게 살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그 아줌마였다. 싹싹 안하고, 표정 항상 썩어 있고, 인사성 어두울 걸!!

아줌마는 내가 방 빼는 날 우리 엄마 앞에서도 내 창찬을 했다. 모든 짐을 다 옮겨 싣고 텅 빈 방에 나타나서 봉투도 줬다. 용돈 3만원. 그제서야 아줌마한테 이것저것 받았지만 하나도 안 고마워하고 있는 나를 봤다. 하하하...감사합니다. 근데 솔직히 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