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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i

숫자에 약한 인간

 

 



"저 퇴근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룰루랄라 사무실 문간을 나서려는데 툭 하고 발치에 뭐가 걸린다. 지저분한 박스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반품>

음 또 실수를 했군. 어디에서 반품한 물건인지 송장을 힐끔 본다. 의미 없다. 어차피 다 내가 보낸 거다. 종종 있는 일이다. '치매인가?' 호들갑도 더 안 떤다. 내일의 나한테 뒷처리를 넘긴다. 종류, 수량 맞춰 책을 세어서 박스에 담는 단순한 일도 제대로 못해서 일을 만드는 그게 접니다! 근데 왜 이럴까? 말로만 듣던 '늙어서 그래'가 신년을 맞이하야 닥쳐온 건가?

으음. 아니요. 늙어서 그렇다고 하기엔 원래 못 했다.

어려서부터 셈이 느렸다. 계산하는 게 돈이든 눈치든 수학 문제든 다 자신 없어서, 차라리 셈을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애들이 편 갈라 싸울 때 누구 편을 들어야 유리할지 계산하는 것도 포기했다. 그 때문에 선생님들은 나를 "두루두루 친하고 교우관계가 좋은" 애라고 칭찬했지만 동시에 수학이 좀 약한 애라고도 했다.

열 살 때였나. 선생님이 구구단 표를 나눠주면서 다음 주까지 외워 오라고 했다. 다음 주에 검사할 거고, 못하면 끝나고 남아야 한다고 하셨다. 못 외우면 3학년에 못 간다고도 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 학교 끝나고 애들하고 쪼로로 문방구에 들러 그 종이를 코팅했다. 이 갱지를 정해진 수명보다 오래 봐야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품고.

집에 들고 갔더니 '혜진이 구구단 외우는구나. 벌써 그럴 나이가 됐네.' 라는 반응이었다.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처럼 생각하는 듯했다. 낭떠러지 끝에 던져지기 직전 새끼사자의 심정을 알 것 같아졌다. "이거 왜 하는 건데? 수학책에도 없잖아!" 엄마는 외우는 걸 도와준다며 '구구단을 외자!' 게임을 하자고 했다. 해 보니 게임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게임이야! 삐질삐질 울면서 외웠다. 기억이 선명하다, 그 개같은 책받침.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기탄수학>이라는 문제집을 풀라고 했다. 한 바닥에 사칙연산 문제만 열 개씩 있는 고리타분한 문제집이다. 할당량 못 풀면 용돈 없다고 겁 줬다. 학교 가져가서 풀겠다고 가져간 다음 계산기로 답 써 왔다. 몇 번 그랬더니 저녁 먹고 식탁에 붙잡혀서 풀게 됐다. 아유 하기 싫어. 하기 싫어서 자꾸 틀리는지 틀려서 하기 싫은 건지 모르겠지만 순탄치 않았다.

그놈의 사칙연산이 고등학교 때까지 발목을 잡았다. 식은 잘 세우는데 계산을 틀렸다.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다른 건 그럭저럭 잘했기 때문에 어이없게 서너 문제 까먹고도 용하게 2등급까지는 갔다. 선생님들은 실수만 잡으면 대박이라고 희망과 용기를 줬다. 고1 담임선생님은 다른 과목은 잘하고 있으니 수학만 꾸준히 올리고 입학사정관한테 잘 어필하면 서울대도 가능성 있다고 둘만 있을 때 조용히 얘기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격려와 서포트에도 불구하고. 시험장의 나는 100 빼기 15가 75라고 믿는 기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건 긴장해서 한 번 실수한 게 아니었다.

열일곱 살 때 제일 피하고 싶었던 상황은 따로 있었다. 바로 선생님이 애들 다 왔는지 세어 보라고 하는 거였다. 수학여행 날. 쌤이 반장아, 하고 불러서 곧 버스 출발해야 하니까 다 탔는지 인원 체크하라고 시킨다. 그럼 나는 버스 통로에 서서 앞자리부터 머릿수를 세면서.

"둘~ 넷~ 여섯~ 여덟~ 열~"

도 미 솔미 도미 솔, 멜로디를 붙여 척척 세다가.

"열둘, 열넷, 열다섯..."

그러다 갑자기 삼십 칠, 삼십 팔... 로 바뀌고... 초집중하고 있는데 누가 말 시킨다.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린다. 포기하고 뒷좌석부터 다시 세고... 오래 걸려도 다 세긴 센다.

"사십 일...다 온 것 같아요."

내가 센 숫자지만 긴가민가하다. 버스가 부웅 떠날 때 운동장 너머에서 '나도 데려가아아악' 하면서 다다다 뛰어오는 애가 있으면 미안해서 어쩌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 왔다고 말하는 다른 반 반장들이 신기했다. 하여튼 대표로 뭘 세야 하는 일을 맡을 때마다 괴로웠다. 방학식 날 반 인원수만큼 교과서 챙겨가라고 할 때, 학원에서 사람 수대로 아이스크림 사오라고 할 때도 예민해졌다. 내 수학점수야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바보처럼 굴어서 다른 누구를 서운하게 할까 무서웠다.

이듬해 이과생으로 한 학기 살았다가 뽀록이 안 통하는 불맛을 봤다. 숫자 세기도 겁나는 수리 감각으로 수학 가형은 무리라는 걸 알았다. 그림 잘 그리니까, 미술학원 갔다. 미대 가기에는 성적이 남는 나를 미술학원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해 줬다. 열여섯 첫 번째 고2에 수학 공부 샷다 내렸다. 완전히 예체능으로 마음을 굳혔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그리고 지긋지긋한 수학에서 해방된 지 올해로 십 년이 되었다. 수포자 인생 10주년.

그러니 열 살 더 먹었다고 뇌가 굳었다는 핑계를 대는 건 안 된다. 가슴에 손을 얹고, 애초에 굳을 지능이란 게 없었다. 오히려 늙었다는 건,

"후훗, 저 수학 못해요. 몇 살이냐고 물어오면 '95년생이요~' 라고 돌려 말하는데 상대가 '95년생이 몇 살이지?' 하면 뇌가 멈추고요, 평생 거스름돈 받을 때 계산 같은 거 해 본 적 없어요. 사실 덧셈 뻴셈 할 때 받아올림 받아내림 숫자 안 적으면 계산 못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벌크업된 얼굴 두께가 아닐까. 쓰다 보니까 역겹다. 이걸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는 자존감 회복의 첫걸음이라고 포장해도 됨? 뻔뻔하게 '원래 그랬어'라고 우기기나 하고, 타성에 쩔어서 죽비로 쳐맞아야 할 정신머리인 게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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