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도록 채식을 하려고 한다니까, 주변 사람들이 내가 고기를 맛없어하는 줄 안다.
"엥 아뇨? 업진살 살살 녹는데요?"
문제는 고기맛이 아니라 공장식 축산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다. 죽이려고 키운다니 몹쓸 짓이다. 내 돈 단 한 푼도 축산업에 쓰기 싫다. 그래서 고기를 싫어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페스코 베지테리언 비슷한 식생활에 자리잡았다.
저커버그는 육식할 때마다 동물이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직접 사냥한 고기만 먹는다고 했다. 나도 공장식 축산 말고 수렵채집으로 잡은 고기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저커버그만큼의 용기와 돈이 없다. 자연사한 동물 사체나 반려닭이 낳은 무정란 같은 건 먹을 수 있겠지만 마찬가지로 못 구해서 못 먹는다.
이때 보다 쉽게, 먹을만한 고기를 찾는 방법이 있다. 내가 지어낸 명칭인데 들으면 좀 어이없을지도 모른다. 고것은 바로 "대머리독수리테리언"이다.
대머리독수리*처럼 남이 먹다 남긴 고기를 먹어치우는 식사법이다. 동석한 사람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티슈로 입 닦기를 기다린다. 상대방의 식사가 끝나면 그 때부터 남은 음식을 "뇸뇸"하는 것이다. 뇸뇸, 뭐 어때? 어차피 버릴 건데. 개인적으로 공장식 축산물을 소비하는 것보다 고기를 버리는 일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이중의 낭비인데다, 남긴 음식물쓰레기는 또 환경오염이다. 그러니 음식물쓰레기통으로 갈 바에는 제 입에다 버려 주십쇼. 음쓰도 줄이고, 프로틴도 보충하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물론 이 방법은 내 식사는 채식이고 남들 식사가 육식일 때만 쓸 수 있다. 애초에 고깃집, 돈까스집, 순대국밥처럼 고기가 주재료인 음식밖에 안 파는 집에 가서 니 밥도 내 밥도 고기뿐이게 되면 의미가 없다. 나도 명색이 채식 지향인인데 그런 밥집만은 한사코 피하고 싶다. 그래서 사전에 밑밥을 깐다. 메뉴 선택에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다.
내가 "저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해요." 라고 얘기한 건 그 때문이다. 고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안 좋아한다는 말이지만 그렇게 이해한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지만 저는 고기가 맛없다고는 추호도 생각치 않습니다... 구구절절 얘기하기 피곤해서 그렇게 얘기했다. 적당히 오해받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니 겉으론 고기 맛없어하는 행세를 하고선 남들 젓가락 놓으면 기다렸다는 듯 고기 몇 점을 집어먹는 꼴이 된 게 좀 자괴감 든다. 한 입 집어먹고 '윽... 맛있어...' 새어나오는 미소를 애써 숨긴다. 이러는 거 우습고 유치해... 아무튼 한동안 이런 사고회로로 죄책감을 회피하고 육식을 해 온 게 사실이다. SNS에 프로 채식러들도 이런 과도기를 거쳐 프로 채식러가 되었을 거라고 위안 삼으면서, 제발 맛없어서 고기 안 먹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 대.독.테리언 생활에 차질이 생겼다. 유일한 육식 루트였던 '남의 밥에 젓가락 대기'가 불가능해졌다. 서로 찝찝한데다 좌석에 칸막이가 생겨서 물리적으로도 팔 뻗을 수가 없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육식 빈도가 훅 떨어졌다. 남이 고기반찬 버리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그래서인지 입맛도 조금 달라졌다. 오랫동안 고기를 안 먹다 보니 고기냄새에 예민해졌다. 기억 속 살살 녹는 업진살은 유니콘 고기였나. 막상 먹으면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소는 안 먹어서 모르겠는데 돼지는 돼지 냄새, 닭고기는 닭 비린내가 심하게 느껴진다. 남들은 이게 괜찮나 싶을 정도로, 음쓰 줄이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들어간 밥도 다시 나올 맛이었다. 내가 고기 주워먹은 밥집이 하필 맛 없는 곳이었을수도 있다. 올해 들어서는 남이 남긴 고기를 먹을 때 행복하게 치팅(?)하는 기분으로 먹은 적이 없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먹을 맛인가' 하는 회의감을 더 느낀다.
아이 참,,, 그럼 이제 진짜 고기를 싫어하게 되는 건가? (두근)
~좌충우돌 비건 지망생의 하루~
*'대머리수리'가 맞다고 함. 독수리(秃수리)에서 독(秃)은 한자로 대머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대머리 독수리'라고 하면 '대머리 대머리수리'가 되므로(두번씩이나... 미안하구나) 대머리 독수리는 잘못된 표현이다.
'tmi'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근깨 (0) | 2021.03.20 |
---|---|
퇴사하면 (네모)할 수 있다 (0) | 2021.03.19 |
숫자에 약한 인간 (0) | 2021.02.17 |
욕망의 귀마개 접기 (0) | 2021.01.31 |
난감한 일 3가지 (0) | 2021.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