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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전시

2월) 전시 보러다닌 얘기들

 

최근 본 전시 10개(피크닉, 국현서울, 국현과천, 서울시립, 아카이브봄, 짓거리, 루프, 연남장)의 단상들. 개념어 쓰임이 적절한지 모르겠고 창의력 바닥나서 껍데기만 빨아 재낀 소감도 고대로 썼다. 백퍼 흑역사 각인데 쪽팔림도 연습해봐야 느는 거라고 블로그를 그래서 하는 거지 뭐...뭐라는 거지 아무튼 시일 지나고도 남아있는 생각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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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피크닉 재스퍼 모리슨 <Thingness>

- 그가 디자인한 실제 제품을 실컷 볼 수 있음. 직접 써 볼 수도 있어서 좋음.

- 결과물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다 보니 그의 디자인 철학을 조명하지는 못하는 느낌. 여러 제품들을 보면서 미감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은 잘 알겠고, 각 제품에 얽힌 에피소드도 재밌게 들었음. 그치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패널에서 찾아 읽어야 함. 글이 긴데 폰트 작고 사람이 많아서 가독성 구림. 뭔가 드라마에서 중요한 전개를 대사로 때워버렸을 때처럼 허탈...

- 재스퍼 모리슨의 할 말은 한 마디로 이건듯. "자신을 앞세우려는 모든 디자이너는 유죄이지만 이는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자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된 사물에는 잘 없지만 익명의 사물은 곧잘 지니고 있는 물건 고유의 신비로운 특징과 자연스러움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원죄 없는 잉태-작자 미상의 사물들, 1990)"

 

 

 

2/1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

- 뒤샹 전시 매우 친절함. 캡션이 흥미롭고 가독성 높아서 지치지 않음. 비슷한 회화 작품이 연속으로 걸리면 지루하기 쉬운데, 캡션이 각각의 변화 양상을 정확히 꼬집어 주어 초반 몰입도가 좋았음.

- 뒤샹의 주요 작품이 움직일 수 없는 형태로 제작되었다는 제약을 적극 활용함. 영상으로 재현한 <에탕 도네>나 실물 패널에 프로젝션한 <큰 유리>는 실물 사진 그대로가 아니라 설명 텍스트와 함께 표시됨. 복제품이 아니라 미디어를 쓴 것도 의외지만 PPT처럼 부분 부분 포커스를 달리 하며 설명 글까지 나오다니 신기했음.

- 국현의 어떤 다른 전시보다 설명충이고 친절한 느낌이었음. 이유를 궁예해 보면 첫째, 미술사에 이미 자리잡은 인물이기에 동시대 작가들보다 해석의 여지가 닫혀 있어서 비교적 부담 없이 학계의 정설을 설명할 수 있음. 둘째, 지명도가 높은 작가라서 관람객 중 비전공자 비율이 높을 것을 예상하고, 낚시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그들에게 고기를 잡아 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거 같음.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 최정화 - 꽃,숲

- 최정화=싸구려 플라스틱 이 공식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쇠못이나 사기그릇 등 싸구려 아닌, 플라스틱 아닌 재료를 쓴 게 눈에 띄었음. 다양한 재료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일상 오브제의 범주에 드는 것들임. 조명과 사운드, 공간 연출이 마치 신성한 사원의 돌탑처럼 보이는데, 그런 물건을 주무르며 삶을 영위하는 일상의 성스러움을 토템처럼 보여주려는 거 같음.

- 하룬 파로키 방에 모니터가 여러 대 달린 것을 보고 기겁해버림. 얼핏 보니까 각각의 구체적 장소와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각적 매력도 있는 꽤 재밌는 영상이었는데, 항상 국현 갈 때마다 그 전시실 볼 때 되면 지쳐서 집중력 바닥이다... 그것을 보게 하려거든 빈백 의자를 놔 주세요,,,

 

 

2/15 서울시립미술관

 

한묵: 또 하나의 시詩질서를 위하여

- 전시 초입 KBS <자랑스런 한국인>에 방송된 한묵의 영상이 있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의 파리 생활과 작업 과정이 바로 이해됨. 그런데 방송 제목의 구시대 국뽕 스멜이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자와 컴퍼스를 들고 고군분투하는 작은 체구의 한묵 모습과 합쳐져서 묘하게 웃프다고 하나...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나는 자연인이다>의 자연인 스타일로, 어딘가 고지식한 괴짜처럼 보였음.

-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동양적 세계관을 담았다는 벽면의 설명을 보았음. 그런데 동양의 그건 잘 모르겠고... 현란한 원색을 칼칠 칼그라데이션한 기하학적 형태가 얼추 과학적인 이미지처럼 보이기는 함. 그러나 무한한 우주 공간이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은유라고 생각하기 전에 나는 windows 화면 보호기 같다고 생각함. 어려서부터 그런 시각요소를 하도 본 우리 세대한테는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다.

- 70년대인가 에칭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음. 디자인전공이라 회화보다 인쇄를 많이 배워서 그런가, 표현기법에서 오는 밀도감이 멋져서 눈을 떼지 못했음. 돈 있으면 사고 싶더라...

 

이스트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 "그들에게 삶에 선행하는 철학이나 이론은 없었다."

- 다 쓰러져가는 폐허에 예술작품 띡 놓는 것을 요즘에는 '쿨'하고 '힙'한 것으로 소비하는데, 원조는 7-80년대 뉴욕의 이스트빌리지. 신자유주의 레이거노믹스 정책 여파로 양극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이 극심하던 시절에 예술가들은 폐허로 내몰리게 됨. 리얼루다가 치열한 생존 투쟁이며 정치적 발언이었는데, 그게 오늘날 카페 인테리어인게 코미디. "그들에게 삶에 선행하는 철학이나 이론은 없었다."는 말도 신선했음.

- 키스 해링도 이스트빌리지의 작가들 중 하나. 알록달록한 색감과 단순한 실루엣으로 대중적 인기가 있지만, 그의 작품엔 에이즈나 인종차별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가 다분하며 그림체가 귀여울 뿐 사지절단 19금 내러티브도 많음. 아동용인 줄 알고 보았다가 충격 먹는 해피트리프렌즈 같음.

- 용세라 디자이너의 그래픽이 찰떡이다. 사스가 베를리너

 

2/17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문명을 귀납적으로 접근. 인간 천태만상을 조각조각 모아서 문명이라는 빅 픽쳐를 그리는 식인데 주제가 주제다 보니 조각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보다가 지쳤음.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진들이라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음. 깊은 심도로 찍은 사진들이 많아서 더욱 또렷하고 직설적이라고 느낌. 문제는 지구력...

- 좋게 말하면 프리하고 나쁘게 말하면 산만하다. 여러 층의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키워드가 너무 많아서 대응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원형 전시실 중앙에는 프레임을 설치하고 사진과 패널을 달았는데 매칭이 안 되어서 혼란스럽다. 전시장 전체 공간 구성이 궁금해서 도슨트를 들었는데, 듣고도 파악이 안 된다. 동선 다 무시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보는 식이 나았겠다. 

- 전시장 구석에 높은 사다리 의자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안전사고 우려 때문에 전시 초반 잠깐 빼고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서 보면 장관이었을 텐데. 높이 올라가서 총체를 조망해야 완성이라고 느껴졌을 텐데. 이걸 못 해서 더 산만하다고 느끼는지도... 아쉽다.

 

2/19 아카이브봄

잉크 빌리지 : A2 리소 포스터

- "디자이너들은 프린터 테스트 페이지를 이렇게 만드는구나."

- 나는 리소 맛을 형광 잉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

 

2/26 대안공간 짓거리

- 사진 속 장소와 인물이 익숙하다. 우리 동네에도 이런 게! 하고 놀랐지만 생각해보면 파주는 늘 그랬다. 구석구석에서 조용히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 평범하다고 믿어 온 일상을 누군가는 유심히 관찰하고 기록해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파주 사람 누가 보아도 비슷하게 느낄 거고, 벌써 지역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 이제 알았나 봄... 아참 중상 초록바구니에 이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야채가게에 전시 포스터라니 힙이다 힙!

- '센스 있음(이 말 왜이렇게 유통기한 지난 말 같지..그래서 가로 안에 넣음)' 요즘 취향에 가깝다는 느낌. 워딩을 자궁 대신 포궁으로, 생리 대신 월경으로 썼음.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단어이면서 동시에 최신 이슈에 무디지 않음을 선언하는 기능도 함. 덧붙여 인쇄물이 워크룸프레스st로 견출명조를 사랑하는 요즘 시각디자인과 취향인 것도 그런 인상을 주는 것 같다. PaTi 학부생이 만들었다고 들었다.

- 파주-여성 들의 내밀한 개인사를 전시하면서, '털리는' 기분이 들지 않도록 조심했음이 엿보인다. 인터뷰이가 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단어 카드를 준비하고, 누드 사진이 실린 도록이 지인에게 보일 것이 곤란하다면 사진을 바꾸고, 퍼포머에 맞추어 퍼포먼스를 설계했다.

- 도록 글이 다 제쳐두고 일단 재밌다. 

 

2/27 연남장 성립

- 작가가 겪은 가장 사회적인 사건은 '취업을 포기한 일'이다. 

- 담론의 부재가 매력인 걸까? 내가 이때껏 알던 좋은 작품들은, 그 앞을 지나칠 때 직감적으로 얘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작품에 매혹되는 건 설레는 일이다. 대신 독해를 실패했을 때 느낄 좌절감과 미안함도 각오해야만 한다. 그런데 성립의 작품은 보이는 것이 전부고, 그 이면에 하려는 말이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게 중대한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어쩌면 반대일 수도. 하려는 말이 아예 없으면, 누구나 작품의 100%를 향유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지치지도, 실패하지도 않는다. 골치아픈 맥락 같은 게 없으니 뮤직비디오, 신발, 책 표지 어디든 사뿐 얹기 용이할테고...

- 응 나만 빼고 다 좋아해

 

2/27 대안공간 루프 20주년

- 뭔가 음식점 옆 테이블에서 생일축하를 거하게 하고 있는 걸 지켜보는 느낌

- 저도 잘은 모르지만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