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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줄근한 여행기

고양이밖에 기억 안 나는 안동 여행

2월 말, 어디든 가고는 싶은데 딱히 어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났다. 그래도 개강 앞두고 아무 데도 안 가면 섭섭하다며 복학을 앞둔 암모나이트 이혜진은 울부짖었다. 룰렛이라도 돌려서 생판 모르는 곳이라도 가야만 한다며... 탄두와 나는 카페에 앉아서 정말로 룰렛을 돌렸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여행지는 안동으로 정해졌다.

 

여행 목표는 오직 집밖 구경이었고 그 소박한 기대는 무궁화호가 청량리역 플랫폼을 미끄러져 나오는 순간에 완전히 충족되었다. 나머지는 그냥 실없이 아무 거나 했다. 그래도 매 순간이 모자름 없이 좋았다.



안동역 내리자마자 있는 간고등어집에서 점심 먹었다. 고등어는 무조건 맛있는데 이 때 우리는 굶주리기까지 했다. 뼈까지 씹어먹을 기세로 해치웠다. 


생선구이는 눈까지 붙어 있어서 더 감사한 마음으로 싹싹 먹게 된다. 눈을 보면 내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는 중이라는 걸 외면할 수가 없다. 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을 얹어서 더 싹싹 뼈까지 감사한 마음으로 깔끔하게 뜯어먹고 친구가 남기면 그것도 가져다가 싹싹 먹고 엄청 게걸스러워 보일 거 알면서도 완전 잘 먹었다. 정말이지 고등어는 신의 선물이다. 제일 맛있는데 제일 싸기까지 하다.



숙소는 치암고택이라는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다. 아주 편안하지는 않지만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용객 후기에 있는 불평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외풍이 심해서 잘 때 춥고, 문에는 잠금장치랄 게 아예 없어서 불안하고, 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 위에 커다란 그리마가 다녔다. 그런데 이 모든 단점들을 상쇄시키고 우리를 살살 녹인 치트키가 있었으니... 고것은 으슥한 밤에 찾아왔더랬다.

  




집앞 묶멍 보리. 시무룩해 보였는데 간식을 보더니 통제불능 희번득 댕댕이로 바뀌었다. 한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컹컹 짖더니 날이 새도록 목이 쉴 때까지 짖었다. 안쓰러웠다. 나도 잠을 설치고 괴로웠지만 그건 절대로 낮에 마신 아메리카노 때문일 거다...



필카 사진은 탄두가 찍어줬다. 셋이 올 계획이었는데 또 둘이 오게 되었다.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한다.


횡단보 "또"



숙소에 짐을 푼 다음 계획은 월영교였고 결론부터 말하면 못 갔다. 안동 버스노선이 너무 어려웠다. 하차벨 누른 곳에 서지도 않고 시간표 보는 법도 모르겠다. 뭔가 우리가 서울에서 알던 것과는 다른 법칙의 지배 하에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해하는 걸 빠르게 포기하고 이 다음부터는 무조건 택시를 탔다.


잘못 탔다는 것을 납득하는 몇 분 동안에 버스는 수 킬로미터를 질주했다. 헐 망했다 일단 내려야겠다며 하차벨에 손을 뻗는 중에도 휙휙 다음 정류장으로 내달렸다. 결국 우리는 어딘지도 모르는 아무 길가에 내려서 지나온 길을 하염없이 되돌아 걸었다. 


1박 2일의 절반을 어이없이 날린 셈이었는데 그래도 즐거웠다. 솔직히 나는 기대치가 하나도 없어서 낙엽만 굴러가도 웃겼다. 나는 그렇다 치는데 걔는 왜 괜찮은지 모르겠다.

 


나 찍어 달라고 카메라 줬더니 떡하니 배경에 초점 잡아놓은 것마저 웃겼다.



닭장 앞에서 롥꼵꼬 주접 떨고 국도변의 커다란 고추 기념비를 웃기다고 하면서 걸었다. 강도 건넜다. 나는 집 앞 육교에서도 목이 턱 막히는 고소공포 쫄보라 좀 힘들었다. 다리 위에서 노을 지는 강가 풍경을 봤는데 딱히 멋있는 그림은 아니었고 뿌옇고 조용했다. 탄두는 유배지로 딱이라고 했다. 이 정도로 실없는 여행이 될 줄은 걔도 나도 몰랐겠지. 그런데도 누구 하나 아쉬운 눈치 없이 앞만 보고 성큼성큼 걷고 있는 게,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쿨하게 느껴졌다.


으슬으슬 춥고 다리가 아파 오던 적당한 타이밍에 버스가 한 대 지나가서 냉큼 잡아 탔다. 기사 아저씨가 우리를 알아봤다. 아까 탔던 버스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온 거였다. 아저씨는 무슨 볼일이 있길래 이런 곳에서 타냐고 물었다. 길을 잃었어요... 아저씨는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요즘에는 요트 타러 서울서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시내 한복판에 태극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이 없다. 무겁게 카메라 가져가 놓고 안 찍고 뭐했나 싶은데 아마 그 앞에 있을 때는 찍기 싫었던 것 같다. 어쩌다가 태극기가...(말잇못)


동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높은 확률 맛집에서 철판돈가스를 먹었다. 안동역 앞 '진성식당' 이었다. 



역시 동네사람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빈 숙소 아랫목에서 몸 지지던 그리마를 밖에다 내놓았다. 샤워장 타일은 얼음장같이 차서 발가락을 절로 오그리게 됐다. 오들오들 떨면서 수도꼭지를 트니까 뜨거운 물이 김을 무럭무럭 내뿜으면서 시원하게도 나왔다. 따끈따끈해진 몸의 물기를 닦을 즈음엔 사방에 온기가 자욱했다. 문 열고 나오니까 밤공기는 또 찼다. 별것도 아닌데 무척 개운했다.

 

자려고 불 다 끄고 누운 지 두 시간쯤 지났는데 문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빼꼼 연 문틈으로 허연 털덩어리가 쑤욱 고개를 들이밀었다. 고양이였다.



밖은 너무 춥고 나는 약한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 이걸 들여 말아, 고민하는 사이에 냥님은 문간에서 저 자세로 잠드셨다. 


다음날 아침에도 나타났다. 나는 자다 깨서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한껏 들떴다. 고양이가 반겨주는 아침이 처음이다.



제 집인냥 드러누웠다. 본가에서 냥집사인 탄두는 꼬질꼬질한 발을 보더니 물티슈를 뽑아 슥슥 닦았다. 냥님은 가만히 계셨다. 



여기서 키우는 고양이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바깥에서 사장님 목소리가 들리기에 문을 열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했다. 그 때 사장님은 열린 문 틈 사이로 방에 고양이가 들어앉은 걸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함을 쳤다. 고양이는 총총 뛰어서 산으로 도망갔다. 사장님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면서 죄송하다고 했다. 사장님은 이불을 정리하고 퇴실해달라는 부탁을 남기시곤 차를 몰아 떠났다. 


고양이가 간 게 못내 아쉬워서 문을 슬쩍 열고 기다렸더니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문턱을 넘는 발걸음이 너무 익숙해 보여서 기가 막혔다. 고양이는 뜨끈한 바닥 위에서 몸을 녹였다. 그 옆에서 우린 브런치랍시고 41도짜리 안동소주와 과자를 집어먹었다. 해가 중천인 건 못 본 척했다. 평소 같으면 부지런히 짐을 싸서 다음 행선지로 떠났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옆에는 하얀색 고양이가 있으므로 그밖의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고 고양이가 하필이면 갈아입으려고 챙겨 둔 내 옷가지 위에 앉아 졸고 있어서 나는 씻으러 갈 수가 없다는 불가항력의 핑계까지 더해져 결과적으로 한없이 게으름을 부리는 서로를 묵인하게 되었는데 그리하여 탄두와 냥님과 나 세 사람이 정오가 다 된 시간에도 일어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리는 원인이 고양이 때문인지 알코올 때문인지 데워진 아랫목 때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빈 속에 술 먹고 뜨거운 물로 샤워하니까 찜통에서 막 나온 랍스터 꼴이 되었다. 햇살이 정수리를 때려가지고 눈앞이 아찔했다. 탄두가 한옥 앞에서 자기 사진 찍어달라고 해서 최대한 열심히 찍어 줬다. 고양이는 어디 갔다 또 슬금 나타나서는, 우리 뜨내기들이 뭘 바라는지 뻔히 안다는 눈빛으로 탄두에게 치댔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고양이였다.


어제 못 간 월영교에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라고 한다. 인스타에 보면 여기서 신선놀음 하는 사진을 얻어 가던데, 이 날은 하늘이 허옇기만 해서 사진 찍을 맛이 안 났다. 



목적 없이 와서 다행이었다.



청량리역에서부터 탄두는 짐이 많았다. 백팩이 집채만하길래 무슨 1박 여행에 짐이 저렇게 많나 싶었다. 물어보면 내가 들어줘야 할 거 같아서 구체적으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페에서 손이 건조하다면서 꺼낸 물건을 보고 빵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로는 로션 샘플 작은 거 가져왔댔는데



않이;; 세타필;;; 이건 욕실에 두고 쓰는 거잖아요;;;


기차 시간까지 스벅에서 한참을 죽치고 앉아 있었다. 여행이랍시고 너무 오래 붙어 있었나. 하다하다 할 얘기가 떨어져서 두 시간째부터는 무료하게 각자 폰을 만졌다. 세 시간째는 앉아 있는 것도 좀이 쑤셔서 못 견디겠다면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번화가라서 놀 데는 널렸는데 같이 뭘 해야 즐거울지 못 정해서 또 한참 방황했다. 해산하고 한시간 뒤에 다시 보기로 했다. 한시간 뒤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표정으로 다시 봤다. 내가 코노를 불태울 동안 탄두는 수제맥주집에서 혼맥을 하고 왔댔다. 둘이 있으면 헤매다가 찢어지면 바로 제 갈 길을 찾아 가다니 역시 사람의 디폴트는 혼자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에 담아 놓고서도 서로가 꼬셔지지 않을 걸 알고 말도 안 꺼냈다가 이때다 싶어 다녀온 게 너무 우리 같아서 속으로 또 웃겼다.


그래도 안동인데 찜닭은 먹어야 한다면서 기어이 반마리 해 주는 찜닭집을 찾았다. 찜닭 골목에 '현진찜닭' 메뉴판에는 없는데 반마리도 된다. 서울에서 먹는 내찜닭 봉추찜닭보다 훨씬 맛있었다. 양도 많아서 배 터지게 먹었다.




여기서 또 소주를 사 먹고... 집채만했던 탄두 짐에 24시간 동안 술병이 몇 개나 더해졌는지 채 못 세었다. 올라오는 무궁화호는 어제보다 느렸고, 문산행 경의중앙선은 더 숨막히게 느렸다. 고양이밖에 기억 안 나는 안동 여행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