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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줄근한 여행기

파주보다 가까운 청주 여행


1박 2일동안 청주 정북동 토성, 충대 근처 막걸리집과 마라탕집,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을 다녀왔다. 숙소는 충대 중문 근처의 극사실주의 친구 자취방 에어비앤비 (https://www.airbnb.co.kr/rooms/6472825?euid=89f36dc8-ecef-6759-0ed8-ef76cf662b9a&guests=1&adults=1) 를 이용했다. 언제나처럼 소소함과 후줄근함을 사랑하는 만만디 여행 컨셉.


여행메이트 지삐는 어느 날 새벽 갑자기 단톡방에 나타나 큐레이터가 되겠노라 선언했다. 솔플의 한계를 느끼던 미술관 덕후(나)는 호다닥 나의 전시 메이트가 되어주지 않겠냐며 프로포즈했다. 엄청나게 오랜만에 한 갠톡이라 보내면서도 뜬금없어서 좀 민망했는데, (디자인과생 말로는)'니즈가 겹쳐서' 일사천리였다. 


과천은 당장 다녀왔고 청주는 다음 주에 가기로 했다. 둘 다 배터리가 쌩쌩하므로 조금 무리인가 싶은 계획도 흔쾌히 고! 했다. 나는 어디서 호랑이 기운이 솟는데 대체 어느 구멍에서 나오는지를 모르겠는 기분이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가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




내가 가는 여행이 늘 그렇듯 사전조사는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일단 SNS 어딘가에서 본 '정북동 토성'으로 향했다.



발리 가는 길




막무가내 사이니지! 우리나라 어느 동네를 가도 기어코 찾아내서 웃고야 만다.


지삐와 나는 현세주의자 같은 구석이 있어서 당장의 행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끔 대학에 너무 쉽게 왔다고도 생각한다. 딴 친구들은 좀비처럼 지내던 고3 때도 삶의 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놀 거 놀았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둘 다 작아지는 시즌이라서인지 이 얘길 하면서도 쭈그러드는 경향이 있다. 둘 중 한 명이 열심히 안 살았다고 자책하기 시작하면, 나머지 한 명이 "아니! 가끔 논 것 말고는 존나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나무라면서 봉합하는 식으로.


아무튼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길바닥에서 웃긴 것들을 주웠다. 당장에 가는 길부터 재밌어야 하니까!




저세상 감성






꺅 시골 개!





충격... 무슨 짤방에서나 볼 법한 미소를 가졌다...


허리춤에 카메라가방과 외투를 주렁주렁 걸쳤더니 그림자 갬성샷의 상태가 





앞서 가는 지삐와 뒤에 켄타우로스

 




기찻길도 건너고 말이 없어질 때까지 한참을 걸었더니 GPS가 정북동 토성에 다 왔댔다.





오? 청주의 명물 정북동 토성 도착


다 쓰러져가는 전신주와 코를 강타한 거름 스멜. 정말로 저 끝에 있는 흙더미가 정북동 토성이 맞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파주사람1 : 심학산 논두렁에도 저런 것 천지인데 왜 여기까지 온 거지?

파주사람2 : 어쩐지 청주 산 오빠한테 물어봤더니 정북동 토성 금시초문이라더라...

아니 그걸 이제 말한다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꿍시렁대면서 쭉 걸었다.




진짜 이 전봇대는 너무한 거 아닌가 하면서도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딱히 웃기는 건 없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즐거운 표정 지으려고 하니까는




사람이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고 누가 그랬더라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전에 교수님 연구실에서 일할 때 잔소리를 들었다. 혜진아 좀 쓸어라! 니 자리에만 지푸라기가 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는데 정말로 매일같이 내 책상 밑에만 지푸라기가 있었다. 대체 어디서 붙어 오는 건지 미스터리였다. 하루 종일 보도블럭만 걸었다고요!

또 '난 왜 가방에서 낙엽이 나올까'라는 가을방학 노래를 내 노랜 줄 알고 받았다가 아니어서 지웠던 게 생각났다.



아무튼 보기보다는 재밌었다.



미세먼지 낀 매직아워! 이 날 찍은 사진은 피의 보정으로도 노을을 만들 수 없었다...



저녁 먹으러 (구)청주 사람 추천 막걸리집 지리산에 갔다. 다음날 간 미술관보다 여기서 훨씬 더 오랫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크 비 오는 일요일은 영업한다니 멋있엉




다 쓰러져가는 주막인데 주 고객이 과잠 입은 대학생들이었다. 뒷 테이블 애들은 페미니스트를 안주거리로 피를 토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 화석즈는 본의 아니게 엿들으면서 킥킥대다가 심호흡을 하고 술을 더 시켰다. 나는 대체 무엇이 그 애들의 스위치를 눌렀는지 궁금했다. 술을 마시면 리스너가 되는 편이라 심야의 대화 지분은 거의 지삐가 가져갔다. 지삐는 자기의 스위치에 대해 얘기했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하나쯤 가지고 있을 예민하고 아픈 구석에 대한 거였다. 


사회학 전공인 지삐는 언젠가부터 나보다 훨씬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말하게 됐다.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면서 해야 하는 어려운 얘기인데도 정연하게 말해서 몇 번 흠칫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려면 하고 싶은 말을 워드에 쳐서 일주일은 고쳐야 할 거야. 못 본 사이에 저렇게 컸다니, 지삐가 보는 나도 그래야 할 텐데... 울기 싫어서 최대한 열심히 딴 생각을 했다. 어떤 기분인지 겪은 적도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감히 공감하는 척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 싫어. 최대한 불성실하게 들었는데도 끝에 가서는 코가 맵고 목구멍이 턱 막혔다.


에어비앤비로 구한 숙소(친구 자취방이라는 말이 훨씬 적절)는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잠들기 딱이었다. 누울 침대 있고 따순 물 잘 나온다. 처음엔 둘다 여행 와서 이런 델 가냐고 웃겨 했는데, 막상 와 보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음날 부은 얼굴로 충북대 앞 중국집에서 첫 끼로 해장 마라탕을 들이붓고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날이 으슬으슬 춥고 숙취가 덜 풀려서 힘들었다.



공사판을 지나서 미술관



이케아 같은 개방수장고



인간은 밥통적 존재라는 시구가 생각났다.



'건방진 김밥'과 노래방 '삑사리의 몸부림' 과 '잘씹는치과'와 구제 옷가게 '구제불능'이 있는 시적인 도시 청주 안녕~